방학을 맞아 친구 가족과 에버랜드에 가기로 했다. 1년 전부터 에버랜드 소품샵에 파는 인형에 눈독을 들여온 것을 아는지라 용돈으로 3만 원을 허락했다. 둘째는 금액을 듣고 신나서 어쩔 줄을 모르고, 첫째는 표정에 신중함이 감돈다. 둘째가 먼저 잠든 밤. 첫째에게 슬그머니 말을 꺼낸다.
"정말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3만 원 조금 넘어도 되니까 아빠한테 이야기해 봐. 허락하실 거야."
첫째는 약속과 규칙을 중요시 여긴다. 어릴 적부터 내가 그어놓은 선을 넘는 법이 없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생기면 어떻게든 손에 넣고 마는 동생을 보며 자가 검열 심한 첫째는 남몰래 억울해하곤 했다. 이번에도 100원만 넘어도 안 살 것을 알기에 슬쩍 이야기를 꺼내보는데 아이의 대답이 영 신박하다.
"싫어요. 3만 원 안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걸 찾아볼게요."
"참지만 말고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떼도 부려보고 협상도 해보고 했으면 좋겠어."
내 말에 아이는 생각에 빠진다. 그리고 몇 분 후 아이가 입을 연다.
"엄마. 돈 더는 안 쓸 거예요. 3만 원 안에서 찾는 게 좋겠어요."
"돈 아끼려 그러는 거야?
"음. 그렇다기 보다는요. 더 쓰는 건 마음이 불편해요.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아서 싫어요."
"엄마가 갚으라 할까 봐? (웃음) 괜찮다니까." 이 아이는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아뇨. 그건 아닌데요. 마음이 불편해요."
마음이 왜 불편한지 한참을 생각하던 아이가 대답한다.
나는 아직 어려서 돈을 못 벌잖아요?
용돈을 벌려면 엄마를 도와주거나 칭찬받을 일을 해야 해요.
그런데 그런 일들은 대부분이 내 자유를 판 대가예요.
"돈이 ㅇㅇ이 자유를 판 값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칭찬받을 일은 엄마 심부름을 하거나 학교에서 뭔가를 잘 해내야 한다는 거잖아요. 심부름을 하려면 내 시간을 팔아야 하고, 칭찬을 받으려면 내 노력을 팔아야 해요.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더 행복해요. 인형이 좋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 시간이랑 노력을 팔지는 않을래요."
아이의 똑 부러진 말에 할 말이 없어진다. 원하는 게 있으면 졸라서 얻어보렴. 했던 나의 질문이 부끄러워진다.
"그럼 팔기 싫은 시간에 하고 싶은 게 뭐야?" 물으니 대답이 청산유수다.
"그림 그리고 음악 듣고 책 읽을 때요. 글 쓸 때도 좋아요."
나의 어린 시절. 방학 내 뒹굴뒹굴하기만 하는 내게 엄마는 물었다.
"너는 목표가 뭐니? 커서 뭐가 되고 싶은 거야?"
"안정과 평화요. 마음에 안정과 평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다예요."
번듯한 장래희망이 나올 줄 알았던 내 입에서는 거창한 포부 대신 어떻게 살고 싶다는 대답이 나왔다고 한다. 엄마는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그런 엄마가 이해가 안 됐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욕심도 야망도 없는 아이를 본다는 건 꽤 답답한 일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11살 된 첫째의 대답은 어린 시절 내 대답과 결이 비슷하다. 내세울 것 없는 인생이었지만 고집스레 안정과 평화를 이뤄온 나다. 그런 내가 너에게 무슨 조언을 할 수 있을까?
너의 가치관이 그렇다면 인정해 주련다. 네 마음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
대가를 치르기도 팔기도 아까운 너의 소중한 자유시간. 맘껏 누려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