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 함께 걷는 길, Jhinnu, Nepal 161230
“짹짹짹짹”
이른 새벽부터 재잘대는 참새들의 알람 소리에 울컥하고 설레던 전날 밤의 마음은 자취를 묘연히 감추고,
“탁탁탁탁”
이른 아침부터 창문 너머로 울리는 짐 싣는 소리에 ‘이제는 실전인 모양이군!’이라는 정체모를 의지가 샘솟기 시작한다.
시커먼 새벽 공기를 뚫고, 새까만 4명의 대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떠날 채비를 한다.
‘조심히 잘 다녀와’라는 서툰 인사를 건네 보는 것은 어떨까 잠시 고민했지만, 내 인생의 단지 스쳐가는 카메오에게 과도한 친절 또한 불순한 것이란 생각에, 틈 사이로 비치는 검은 그림자에게 남몰래 안전을 기원한 후, 다시 눈을 붙인다.
“이 친구는 크리샤라고 해요. 영어는 잘 못하지만, 한국어는 조금 하니까, 같이 다니는데 큰 불편함은 없을 거에요. 조심히 잘 다녀와요.”
눈을 떠보니, 5박 6일간 나의 나침반이자, 길동무가 되어 줄 아리따운 여성, 아니 녀석이 고운 뒤태를 과시하며 택시에 내 짐을 싣고 있다. 170cm 가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소박한 키에 50kg을 간신히 넘을 것 같은 소심한 몸무게를 소유한 이 친구가 어젯밤 <산촌 다람쥐> 주인에게 받은 핀잔으로 잔뜩 부풀어진 내 가방을 메고 목적지까지 과연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 심각하게 들었다. 결국 이 무거운 짐을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강력한 물음표가 내 몸을 휘감는다.
택시에 짐을 모두 실은 뒤, 고개를 휙 돌리고 나에게 환하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크리샤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전 한국을 좋아해요. 이건 우리 일정이에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 속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의 인상이 돋보인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비해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그의 얼굴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서려있다.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한 후에, 그는 미리 짜 온 스케줄을 공유한다. 20년간 배워 온 적절한 나의 영어와 2년 동안 배웠다고 한 적합한 그의 한국어로 주거니 받거니 웃음을 섞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앞으로 6일간은 한식을 먹을 수 없으므로, <산촌 다람쥐>에서 제육덮밥으로 든든하게 아침 식사를 해결한 후, 택시를 타고 트레킹의 시발점인 시와이로 향한다.
멀리 펼쳐진 눈 덮인 히말라야의 주술에 걸린 탓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시간을 태엽으로 감은 듯, 도로 위의 중앙선은 옅어져 가더니, 어느새 중앙선은 사라지고, 아스팔트 도로마저 울렁꿀렁 비포장 도로로 바뀐다.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 여행하듯, 한 시간 반 가량 마주오는 차와 지그재그, 앞서가는 차와 엎치락뒤치락 곡예를 펼치다 보니 어느새, 히말라야로 향하는 태엽이 완전히 감긴다.
드디어 시작이다. 드디어 시와이다.
합리적인 택시비를 지불한 뒤, 야채와 계란이 함께하는 볶음밥을 섭취한다.
“다다다다” 포카라로 향하는 버스는 굉음의 엔진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드드드드” 더불어 5박 6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 태엽이 풀린다.
앞으로의 여정을 인도할 예정인 크리샤는 해맑은 웃음과 적합한 한국어로 금일 나의 목적지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한다. 그가 구사하는 제한된 한국어 단어들과 어눌한 억양에 비해, 노련한 그의 손짓과 표정에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신뢰감이 풍겨져 나온다. 그러나 호리호리함을 넘어 비실비실해 보이는 그의 어설픈 몸매를 볼 때, 여전한 물음표가 내 머리를 휘감는다. 어쩌겠나, 주사위는 던져졌고, 물음표는 적당히 무시한 채, 그와 함께 강력한 팀워크로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가야지라고 반듯하게 마음을 먹는다.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자기 몸통보다 훨씬 큰 나의 짐과 그것을 보기 좋게 묶어 버린 그의 짐을 함께 메고 발걸음을 내딛는다.
얼마간의 황량한 흙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풀과 물, 나무와 돌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리고 친절한 표지판의 안내를 받게 되면,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기분 좋게 구성되어 있는 조화로운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이제부터 실전이다.
오늘은 6시간을 걸어야 한다. 마구 걸어야 한다. 오르막길도 걸어야 하고, 내리막길도 걸어야 하고, 계단이 있어도 걸어야 하고, 강물이 흐르는 다리 위도 걸어야 하고, 동물이 있어도 걸어야 하고 사람이 지나가도 걸어야 한다. 걸어야 한다. 마구마구 걸어야 한다.
셋, 둘, 셋, 넷, 넷, 둘, 셋, 넷, 마구마구 걷다 보면, 소도 나타나고, 말도 나타나고, 똥도 나타나고, 사람도 나타난다. 그리고는 금세 사라진다. 마구마구 걷다 보면, 이런 장면이 마구마구 반복된다.
마구마구 걸어야 하는 트레킹이 아직은 낯설다.
나의 걷기는 발바닥부터 시작해서 아킬레스건을 지나 종아리, 허벅지 근육까지 이어지는 규칙적인 운동으로 인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수의근이 지배하는 반복 운동으로 점점 전환되고, 이 점들이 모여 하나의 선을 만든다. 계속 걸어야 한다. 정수리에서 구레나룻까지 이어지는 흥건한 땀이 정지를 외칠 때까지 계속 걸어야 한다.
그.러.나, 농구와 헬스로 단련된 나의 튼튼한 바디도 쉼 없이 걷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크리샤와 나, 우리는 규칙을 정했다. 1시간 쉬고 10분 쉬는 걸로. 지정된 경로를 따라, 마구마구 걷다가, 어느 선에 다다르면, 크리샤와 나, 그리고 나의 생각만이 존재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 순간이 지속되면, 반드시 쉬어야 한다. 쉬는 동안 생각한다. 이렇게 계속 걷는 것이 나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음표가 나의 머리인지 몸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어딘가를 끊임없이 휘감는다. 10분이 지나면, 물로 목젖을 충분히 적신만큼 나의 의문도 나의 의식 전체를 흥건하게 적신다.
다시 걸어야만 한다. 닥치는 대로. 마구마구. 다시 걷기 시작하면, 불수의근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계속 작동하는데, 가파른 오르막길 위에서 어디선가 선명하게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기상천외한 축제가 시작된다. 마치 나의 행운과 행복을 빌어주기 위해 쉼없이 쏟아지는 축포처럼,
새하얀 염소들이 하늘에서 굽이굽이 쏟아진다.
목동의 현란한 지휘 아래, 염소들은 그 좁은 오르막길, 아니 그들에 겐 내리막길을 재빠르게 타고 내려온다. 그 많은 염소들이 나에게 한 마디씩 소곤댄다.
"Welcome to Himalaya"
염소들로부터 5분여간의 격렬한 환영식을 받은 후, 본능적으로 머리인지, 가슴인지 어딘가에 품었던 의문은 모두 소멸되고, 길 위의 당당한 주인공으로서 이 번 여행의 의미를 바로 새긴다.
'어떻게 되겠지. 그냥 끝까지 가보는 거야. 목표한 그곳까지.'
트레킹 고비고비마다, 걸음에 지친 트레커들을 위한 오아시스가 존재한다. 걷다가 지친 모두에게 물과 음식을 보충할 기회를 주고, 평화로운 휴식시간을 제공한다. 평균적으로 보면 이런 오아시스는 2시간에 한 번 꼴로 나타난다. 숙박도 가능하고 간단한 세면도 가능하다. 물론, 배설 공간도 충분히 갖춰져 있다. 시와이에서 시작된 트레킹에서도 2시간 정도를 걷다 보면, 뉴브리지라는 평화로운 오아시스가 나타난다. 꿀 같은 휴식 시간 동안 크리샤에게 다음 오아시스까지의 시간과 거리를 측정한다.
태양은 트레커들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된다. 하지만, 그가 퇴근하고 나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해가 지기 전까지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 조금은 서두른다. 그렇게 가는 걸음을 재촉하다보니, 첫째 날의 6시간 히말라야 트레킹 적응기를 무사하게 마치고, 목적지인 지누에 도착한다. 도착하자마자 크리샤는 매우 능수능란하게 로지를 예약하고 식사 메뉴를 나에게 물어 본다. 고도를 높여갈수록 모든 재화의 값이 비싸지고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의 양은 한정적으로 변한다. 특히나 단백질은 희귀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 단백질을 최대한 섭취해야 한다. 크리샤에게 영양섭취를 위한 음식을 주문하고, 나는 짐을 풀기 위해 로지로 향한다.
지금 이 시점에는 등산객이 그리 많지 않아서 2인 1실의 로지를 혼자 사용할 수 있다. 행운이다. 그리고 뜨거운 물도 나온다. 행복하다. 땀으로 범벅이 된 나의 몸을 샤워로 정갈하게 한 다음, 식사를 한다. 약간의 닭고기와 카레, 그리고 밥과 네팔식 누룽지 같은 음식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다.
깨끗이 그릇을 비운 후, 와이파이를 찾아서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몇 차례 카톡거리다가 따뜻한 차와 함께 오늘의 기억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안녕 H. 한국에서 내가 추천한 노래인 더필름의 '아직 그대라는 게'라는 노래를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그 가수 중에 '함께 걷는 길'이라는 노래도 있는데, 그 노래도 참 좋으니, 꼭 한 번 들어봐. 오늘은 첫 등반을 성공적으로 마쳤단다. 나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포터'라고 불리는 네팔 가이드와 함께 하니 여간 편할 수가 없었어. 짐도 들어주고, 밥도 알아서 시켜주고, 잠잘 곳도 알아봐 주고. 그런데, 한 편으론 저렇게 무거운 '나의' 배낭을 들어주고, 굳이 시키지 않아도 '나의' 밥을 시켜주고, '나의' 잠 잘 곳을 알려 주는 것이 마냥 편하지 않았어. 난 저 친구를 고용할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노동력을 착취할 만큼의 자격도 없는데, 그저 길동무, 말동무가 되면 되는데, 저렇게 마른 친구가 자기보다 큰 배낭을 메고 내 앞을 걸어가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 비록 내가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특권이라고 할 지라도. 그런 의미에서 있잖아 난 '함께 걷는 길'이 좋아. 함께 손 맞잡고 걸어가는 그런 길. 가끔씩 내 옆 사람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몰래 힐끗 쳐다보면서 땀나도록 걷는 길. 그런 것이 진정한 꽃길이 아닐까? 돌아오는 토요일 예정대로 우리가 남산을 올라가게 된다면, 난 너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싶어. 때론 내가 앞서 갈 때도 있을 것이고, 때론 내가 뒤쳐질 때도 있을 테지만, 손 맞잡고 앞을 보며 함께 걸어가고 싶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다가 가끔씩 부담스럽지 않은 서로의 옆모습을 챙겨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행복할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난 숨을 헐떡거리며 6시간을 걸어 드디어 도착한 지누의 오늘 밤을 기억하게 될 지도 몰라. 그러니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때까지 건강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