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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Apr 17. 2023

내가 대신 기억해 줄게, 너의 첫 소풍

출근길에 첫 소풍(정확히는 현장학습이라고 한다)을 기대하는 딸내미의 경쾌한 뜀박질(그녀는 걷지 않고 한달음에 교문까지 뛰어갔다)을 보며 나까지 설레는 마음이다. 황사가 심하다는데, 조잘조잘 "떨린다"라고 감격해하는 그녀를 감싸고 있는 공기는 쨍한 하늘색처럼 느껴진다.   


며칠 전부터 준비물이 적힌 알림장을 몇 번이나 살펴보고 (왜 나한테!) 준비됐냐 확인하는 딸을 보면서 "니 건 네가 준비해, 짜샤"하긴 했지만 나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작은 크기의 물티슈와 휴지를 사고, 차멀미를 할 수도 있다니 반드시 검은 봉지를 준비하라는 지령에 떨고, '1인용 돗자리'라는 뭔지 모를 준비물 지시에 검색하고 묻고 마침 집에 있는 걸 발견해서 싸둔 뒤 당일 아침 구입할 김밥의 판매처 사전답사와 전화확인까지 차곡차곡 마친 뒤 드디어 설하가 (준비시간만 놓고 보면) 대장정?!을 떠났다.


나름대로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힘차게 뛰어가는 설하의 뒷모습을 보니 가방끈 좌우 길이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차마! 내가 직접 싸진 못하고 김밥을 사서 넣어준 도시락통은 분명히 다른 친구들 것만큼 예쁘지 않을 텐데, 혹시 딸이 실망할까 걱정이 앞선다. 당최 이해가 안 가지만 죽고 못 사는 (퍽킹) 시나모롤 도시락을 주말에 사둘 걸 그랬나. 월요일 아침 출근길을 가득 채운 심산한 회사원들 마음에 미안한 엄마의 마음을 추가해 애꿎은 운전대만 벅벅 쳤다.


나의 첫 소풍은 기억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쌓이는 동안 더 큰 감격과 설렘이 그렇지 않은 기억을 몰아낸 모양이다. 내 뇌는 용량이 적다. 주말 내내 설레하고 오늘 아침 박자를 맞춰 뛰는 딸을 보니 '23년 4월 17일 설하의 소풍길'은 딸의 추후 인생에서 밀려나면 아쉬운 장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대신 정리해 주는 이유다. 나중에 딸이 나만해졌을 때, 그래서 나처럼 버티고 견뎌야 하는 일로 슬퍼지고,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으로 뇌의 용량이 넘쳐날 때, 엄마가 남긴 추억을 보며 이때 누렸던 환희의 감각을 살려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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