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지나 Jul 14. 2024

진화의 결정체와 사투를 벌이다

마당 있는 주택생활자의 헛소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안 하면 안 하고 미루면 미뤘지, 한번 일단 시작을 하면 우와아악 다 죽여버릴 거야, 하는 성질을 마당 넝쿨 제거에 활용해 보았다. 내 딴엔 준비한답시고 챙이 넓은 모자도 쓰고 모기기피제도 들이붓고 과업에 임했는데, 가장 중요한 걸 빠뜨렸다. 긴 팔과 긴 바지. 결과적으로 채찍질을 당한 것처럼 사지에 무작위 방향의 생채기가 났다. 니트릴 장갑은 맹수를 잡을 때 쓴 것 마냥, 일을 끝냈을 때는 굳이 뭐 하러 꼈나 싶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

 

넝쿨 이 색기는 그만큼 대단했다. 뽑고 자르고 저주하느라 바빠서 이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검색을 못했는데, 내 경험을 빗대 이름을 짓는다면 '진화의 결정체'. 이보다 더 효율적이고 최종적인 진화의 결말이 있을까 싶은 이 식물, 아니 식물빌런!

 

일단 상대에게 상처를 가할 수 있는 빳빳하고 뾰족한 잔털이 눈에 띈다. 오다가다 뽑을 수 있는 잡초들도 많은데, 이 놈은 손아귀에 붙들려 뽑힐 가능성에 대비한 준비가 돼있다. 잡으면 바로 아프고 심지어 피부에 가시에 가까운 잔털이 박힌다.  거기에 운동력?도 상당해서 감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정말 단단하게 붙들며 나아간, 아니 질주한다. 근처에 있던 대추나무와 향나무가 거의 이 놈의 지지대처럼 잠식당해 있었는데, 잡아당기면 나무까지 뽑혀 나갈 정도로 주위를 감고 있었다. 


그렇게 쭉쭉 나아가다 줄기가 땅에 닿는다면, 바로 여기라는 듯 그 자리에 바로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이 개색갸 너 잡혔어, 하고 쭉 잡아당기면 마치 지뢰가 터지듯 뿌리를 내린 곳이 아 들켰네! 하며 투투툭 딸려 올라온다. 소름... 역시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으나 쇼핑중독으로 보이는 남편이 사다 놓은 여러 잔디 정비용 장비들을 골고루 사용하면서 이 진화의 결정체와 사투했다. 갈고리로 긁고 자르고 뽑고... 천적인 나에게 들키지 않고 오래 견딘 줄기는, 아래쪽이 목질화 단계 수준으로 단단해져 있었다. 끄아아!!! 맘 같아서는 진짜 화염방사기로 박멸해버리고 싶었다.

 

이 지역 '진화의 결정체'께서는 채찍질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하고 약간 미친 인간 천적의 존재를 깨닫고 다시 한번 진화를 시도할지 모르겠다. 체력의 상실 외에 내가 가장 손해 본 부분은 까슬린 부분이 아파서 후시딘을 바른 것인데, 만약 이 부분을 진화의 결정체가 캐치했다면 그 엿같은 잔털을 더 가혹하게 벼를 것이다. 나도 다음에 이 놈과 싸울 때는 방화복 빰을 때릴 정도로 완전무장을 하고 올 것이매, 진화의 결정체와 윤지나 간 진화적 군비경쟁은 계속될 것이다. 


진화적 군비경쟁 단계까지 돌입하지 않았을지언정, 다른 잡초들의 생명력도 기대 이상이다. 잔디가 깔린 마당을 소유하고 돌보다 보면, 비 온 뒤 반나절만에 잡초가 한 뼘씩 자라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한 계절만 사는 종인데도 불구하고 그 기간이나마 목질로 나겠다는 의지의 생물들도 수두룩하다. (역시 귀찮아서 검색을 하진 않았다) 인간이 만약 이 속도로 자란다면 아마도 뼈에 구멍이 숭숭 나있을 것이다. 선인장의 경우 뜨거운 볕을 받으라고 베란다에 내놓으면, 그 사이 얼마나 컸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기존 몸체와 말랑한 신 몸체?의 색이 다르다. 


이들 식물들 입장에서는 길어야 100년을, 그중에 막판은 자연 상태라면 결코 유지할 수 없을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내는 인간이 가소로우면서도 두려울 것 같다.(지나친 감정이입 주의) 가소롭다와 두렵다는 두 가지 감정은 함께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것이로고. 뿌리만 제대로 살아있다면 열정적이고 지속적인 생명력으로 몇 백 년은 거뜬히 살아낼 수 있는 식물들 이건만, 한 순간 나 같은 인간을 만나면 순식간에 그 가능성이 제거된다. 조선시대에 왕의 그늘이 돼줬다는 이유로 벼슬까지 받았던 거대한 소나무(인지 향나무인지 여하튼 먼 침엽수였음)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밑동을 자르겠다며 전기톱을 들고 나타난 닝겐이 얼마나 하찮으면서도 공포스러울까. 


그래서일까. 러시아에 '불멸화위원회' 라는 게 있었다(지금도 있나). 같은 이름의 책으로 알게 된 운명 초월 프로젝트 위원회인데, 인간이 인간 종을 초월하는 불멸의 삶을 얻으려고 갖은 미친 짓을 하고 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얘기고 나름의 철학적 주제도 있다. 그 와중에 저열한 내가 인상 깊었던 부분은 따로 있다. 만약 사람이 식물 같은 방식의 불멸을 얻게 된다면, 전기톱으로 나무 밑동을 자르고 뿌리를 뽑아버리는 일종의 사고, 이를테면 교통사고라든지 천재지변이라든지 여하튼 유구할 수 있는 생명을 차단하는 단 하나의 이벤트에 굉장히 예민해질 거라는 아이디어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안전제일을 외치며 집안에만 머물고 칼질 하나에도 혼신을 다하게 되지 않을까. 


아,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진화의 결정체와 일전을 치른 경험을 정리하다 보니 필멸의 존재로서 이 짧은 생을 아등바등 사는 게 갑자기 가치 있게 느껴진다. 오늘은 일요일. 건네받은 나의 유전자로 지구에서의 생존 기간을 늘리고 있는 나의 딸과 할 일이 많은 날. 자자 렛츠 고.  


아쉽게도 비포 사진이 없다. 계획은 없고 목표만 있는 개썅마이웨이의 태도의 일환. 

저기 흙 부분이 거의 정글이었다. 그 사이에서 닝겐을 위해 투쟁하고 있던 토마토도 구조함. 

매거진의 이전글 기자협회 여성풋살대회 2년 연속 준우승 썰 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