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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을 놓는 마음

집을 대할 때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

by 허남설
396917217_6874203399291937_796329653411576949_n.jpg ⓒ허남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에는 현재 주민이 거의 없다. 재개발 인허가가 최종 문턱을 넘을 듯해 보였던 2~3년 전부터 떠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다. 이제는 거의 '유령 마을'에 가깝다.


지난 6월 백사마을에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 그 집에 지금 사람이 사는지 안 사는지 알려주는 뚜렷한 표지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는데, 그것은 '화분'이었다. 사람이 손으로 직접 가꾼 듯한 식물이 군데군데 있는 동네와 없는 동네는 풍기는 기운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몇 집 안 남은 백사마을은 휑하기 그지없었고, 빈집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스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경계심을 바짝 세우고 그런 마을의 골목을 헤매다가 사진 속의 집과 주인 아주머니를 우연히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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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주머니는 집 앞을 가득 채운 화분에 물을 주고 계셨다. 화분이 어찌나 빼곡한지, 마치 잘 가꾼 화원 같았다. 아마 어제도 물을 주셨을 거고, 내일도 물을 주실 거다. 재개발한다고 하니 대부분 떠버린 동네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예쁜 파사드(facade)였다.


주인 아주머니는 인터뷰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으셨고, 대신 사진 찍어가는 건 괜찮다고 하셨다. 사진은 나중에 내가 쓴 책 <못생긴 서울을 걷는다> 표지 후보에도 잠깐 올랐다. 결국 '못생긴 서울'의 풍경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보여준다고 판단한 세운상가 일대 사진이 채택됐지만.


가끔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니는 오래된 동네 어디에서든 이렇게 화초를 정성스레 가꾼 집을 꼭 만난다. 하다못해 버려진 스티로폼 상자를 주워다가 부추나 상추, 쪽파나 대파를 심어놓는다. 그렇게 자신만의 정원, 농장을 꾸민다. 그런 장소를 볼 때마다 이게 마땅히 우리가 집을 대하는 자세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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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설

주류 재개발 방식을 비판적으로 진단한 책을 쓰고 나니, "그럼 대체 대안이 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물론, 재개발 정책에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 내가 처음도 아니고, 그 역사가 아주 길기 때문에 이것저것 대안이랍시고 시도했거나 지금도 시도 중인 것들이 있다. 얘기하자면 끝도 없다.


그런데, 결국 그 시시콜콜한 대안 밑바탕에 필요한 건, 오늘도 백사마을에서 나만의 화원을 가꾸고 계실 아주머니의 마음 같은 것이 아닐까. 10여 년 전 영화 <건축학개론>이 주인공 엄마의 입을 빌어 그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적 있다. "집이 지겨운 게 어디 있어. 집은 그냥 집이지." 이런 마음을 다 같이 탑재하자고 무슨 캠페인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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