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강 노들섬에 토마스 헤더윅(Thomas Hetherwick)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 찬성하지 않는다. 1조5천억 원이라는 막대한 건설비에 대한 거부감보다도, 그가 구상한 조형이 한강의 풍경에 녹아들지 않는다는 게 더 큰 이유다. 헤더윅은 직접 노들섬을 방문하고(건축가가 현장에 가는 건 당연해 보이지만, 유명 건축가는 그러지 않을 때도 많다.) 서울시가 주최한 프레젠테이션에도 직접 나서며 이 프로젝트에 상당한 열의를 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아이디어는 노들섬에 어울리는 답이 아닌 듯하다. 헤더윅은 서울의 7개 산―아마도 인왕산 등 내사산과 북한산 등 외사산―을 디자인 모티브로 삼았다면서 일종의 토속성(vernacular)을 주장하지만, 아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서울의 산은 그가 제안한 구조물처럼 노들섬 혹은 서울을 지배하거나 군림하지 않는다. 그저 품을 뿐이다.
토마스 헤더윅이 제시한 노들섬 아이디어 '사운드 스케이프' ⓒ서울시
토마스 헤더윅이 제시한 노들섬 아이디어 '사운드 스케이프' ⓒ서울시
그럼에도 헤더윅이 이런 값비싸고 복잡한 구조물이 노들섬 혹은 서울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귀담아들을만하다. 그가 서울시민을 설득하려고 제작한 영상과 프레젠테이션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다. 마침 그의 건축을 이해할 수 있는 전시회(<헤더윅 스튜디오: 감성을 빚다>)도 2023년 9월6일까지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다.
헤더윅은 현재의 노들섬을 "감동 없는 (상태)"라고 평했다. 이 발언은 많은 한국의 건축가들을 화나게 했다. 2000년대 초반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추진한 이후, 이 섬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하여 논쟁이 거듭된 역사가 있다. 노들섬 생태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되 오페라하우스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대중음악 관련 시설을 대부분 지하에 파묻는 형태로 아주 나지막하게 세운 현재의 노들섬이 그 격론의 결과다. 이 지난한 시간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날 공모전에 초청받아 서울에 뚝 떨어진 영국인 건축가의 일갈이 매우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런 접근법은 군림하고 지배하는 듯한 결과물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그럼에도 그가 추구하는 '감동적인 건축'의 필요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특히, 모든 걸 파괴한 전쟁을 딛고 일어나 재건한 도시 서울, 그래서 모든 걸 백지로 만들고 다시 세우는 방식에 익숙한 도시 서울에서는.
ⓒTom Hill on Unsplash
헤더윅은 "도시에서 당신은 어떤 느낌을 받는가?"라고 묻는다. 사실, 우리는 도시에서 무슨 느낌을 받으면 좋을지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감동? 그냥 답답하지만 않으면 좋겠다. 그래서 헤더윅은 "우리 모두가 지루함이라는 전염병 속에 살고 있다"라고 믿는다. 이 전염병을 "전 지구적 재앙"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인류가 재앙에 빠진 건, 헤더윅에 따르면, 오늘날 도시의 건축물에 "감정(감성)의 기능"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건축물에서 어떤 감정을 느낀다'는 건 전혀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다. 건축물은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준다.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편안하거나 위압하거나. 그래서 헤더윅의 말은 하나마나한 소리 같은데, 관점을 역사적으로 늘여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의 건축에는 아직도 이른바 '기능주의'라는 유산의 뿌리가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헤더윅의 어머니는 앤티크 가게를 운영했다. 그곳에서 파는 물건을 떠올려 보라. 기능주의의 시각에서는 매우 조잡하고 낭비적이고 쓸모가 부족한 것들이다. 시계가 '기능적으로' 시각만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세계에서는 시계의 형태를 왜 공들여 조각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근대 이후 건축을 딱 이렇게 대했다. 벽을 기능적인 창과 창이 아닌 부분으로 나누자, 섬세하게 조각해 짜 맞춘 몰딩은 불필요했다. 요소를 줄이자 살아남은 요소가 차지하는 몫이 커지며 구성은 아주 단순해졌다. 이런 기조를 극한까지 추구한 디자인에 '미니멀'이라는 수식을 붙이며 예찬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도시의 벽은 지루한 어떤 것이 되었다.
ⓒCeKuhn on Unsplash
헤더윅은 이 무(無)-쓸모의 요소를 회복하는 데서 건축의 감동이 나타난다고 본다. 그는 앤티크 가게의 물건처럼 아주 조소적·조각적인 작은 형태를 구상하고, 이를 이어 붙이거나 쌓아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감동을 구현하고자 한다. 그가 제시한 노들섬 아이디어에서 기시감이 드는 건, 이런 방법론을 세계 곳곳에서 적용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뉴욕의 '리틀 아일랜드(Little Island)'(2013), 상하이의 '천 그루의 나무(1000 Trees)'(2021) 등에서 비슷한 조형 언어를 구사했다. 서로 다른 도시에 유사한 형태를 심는 태도는 자칫 제국주의적이라는 의심을 살 수 있지만, 어쨌든 헤더윅은 이것이 초대형 프로젝트가 된 현대 건축을 그나마 "인간답게" 바꿀 장치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 장치의 모티프는 단연 나무일 것이다(헤더윅은 리틀 아일랜드 프로젝트를 설명하며 '화분'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헤더윅은 건축 요소로서의 나무에 천착한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상하이 엑스포 영국관(UK Pavillion·2010)은 나무의 씨앗을 심은 구조물이다. 표면을 관통하는 6만6000여개 광학섬유 하나하나에 씨앗이 담겼다. 영국의 암치료병원(Maggie's Yorkshire·2012)을 맡았을 때는 잘 보전된 풀밭에 건물을 짓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건축물에 자연이 풍성하게 녹아들게 했다. 헤더윅은 이 건물에서 생물 다양성이 4배나 커졌다고 강조한다.
Little Island ⓒHetherwick Studio
1000 Trees ⓒHetherwick Studio
2012 Shanghai EXPO UK Pavilion ⓒHetherwick Studio
헤더윅은 이렇게 생물 다양성을 말하듯 "건축 다양성"을 주장한다. 굳이 종을 나누자면, 헤더윅의 건축은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과 유사한 종에 분류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헤더윅은 '신'이 아니라 '인간'을 불러낸다는 점에서 가우디와 다르다. 그의 목표는 "이(나의 건축물)를 시작으로 세계적인 인간성 회복 운동이 일어나고, 영혼 없는 비인간적인 장소를 더는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문화역서울284 2층에는 '복원전시실'이 있다. 헤더윅 전시를 모두 둘러보면 이 무료 전시관도 둘러볼 수 있다. 이곳에는 과거 이 건물이 경성역으로 쓰였을 당시 사용한 문고리가 전시되어 있다. 문에만 매달기에는 다소 아까운,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이라도 하나 매달아야 꽤나 만족스러울법한 모양도 있고, 새의 깃털과 소라 껍데기에서 착안한 것 같은 모양도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문고리 하나도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 문고리 형태가 지금처럼 심심하고 재미없어진 시간은 과연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될까? 헤더윅은 이성과 합리라는 이름으로 억압했을지 모를 인간성에 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