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인테리어는 사람입니다."
서울시 성동구 송정동 73-225번지 코끼리빌라는 3층짜리 주택이다. 말이 3층이지, '반지하'라고 부르는 층이 한 개 더 있으므로 실은 4층이다. 1980년대 정부는 폭발적으로 불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지하층의 주택 사용을 허용했고, 그 시기 땅을 가진 사람들은 너도나도 코끼리빌라 같은 주택을 지었다. 송정동에 걸음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송정동의 시간은 거기에서 딱 멈췄다. 그래서 낡고, 긁히고, 부서졌지만 <응답하라 1988>에서 본 것만 같은 정겨움도 묻어나는 동네다.
지금 이 코끼리빌라의 소유주는 유명 사설학원의 후계자다. 이 동네 사람도 아니고, 부동산 개발업자도 아니다. 달랑 집 한 채 가진 노인이 생계형 임대업이나 할 법한 동네에서 그런 사람이 대체 왜 흔하디 흔한 빌라를 샀을까. 어떤 큰 그림이 있을지 헤아릴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가 이 코끼리빌라를 단돈 '1유로(€)'에 3년 동안 한 건축가에게 빌려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건축가는 이 빌라를 감싼 붉은 벽돌 위에 '1EURO PROJECT'란 글씨를 선명하게 내걸었다.
그 건축가, 최성욱 로칼 퓨처스(Lokaal Futures) 대표는 경복궁 서측 동네, 서촌에서 살았고 무역과 간척지의 나라, 네덜란드에서 공부했다. 서촌에서는 한옥이 아파트가 되길 바라는 주민들을 보며 충돌하는 가치 사이에서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유연한 사고와 태도를 바탕으로 쉽게 쉽게 혁신에 접근하는 문화를 목격했다. 그런 고민과 충격을 안고 살 때쯤 유럽에서 유행처럼 번진 '1유로 프로젝트'를 만났다.
1유로 프로젝트는 용도를 딱히 찾기 어려워 방치된 공간을 말 그대로 1유로에 빌려 쓰는 프로젝트다. 프로젝트의 구체적 내용은 정하기 나름이다. 최성욱 대표는 네덜란드에서 100년 된 정수장이 호텔과 유기농 텃밭·레스토랑이 어우러진 명소로, 마약과 매춘이 들끓는 슬럼가가 건축가와 예술가가 활발하게 교류하는 동네로 거듭나는 걸 봤다. 그 사회에는 이런 유휴 공간을 1유로만 받고 10년, 50년 동안 선뜻 내주는 정부와 건물주가 있었다.
이런 사례를 두고, 최성욱 대표는 "도시의 가장 좋은 인테리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그 도시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2016년 귀국 직후 '서울로7017'과 연계된 서울역 일대(중림동·서계동·청파동 등) 재생 프로젝트에 참여한 뒤, 송정동에서 지역재생 활동을 이어가던 중 코끼리빌라를 알게 됐다. 소유주가 먼저 그를 찾았는데 처음에는 "그냥 투기하시는 분"인 줄로만 알았다. 네덜란드에서 본 그런 부류의 건물주인지를 미처 몰라봤다.
2022년 6월,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코끼리빌라에서 한국 최초의 1유로 프로젝트가 태동을 시작했다. 송정동은 벚꽃길로 유명한 송정제방길을 끼고 자리했고, 한양대·건국대 등 4개 대학에서도 멀지 않다. 아파트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오래된 저층 주택이어서 다양한 세대와 계층의 사람들이 진입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 다만, 씻고 잠을 잘 집 말고는 다른 '뭐'가 없다는 게 문제다. 근래 성동구의 성장을 견인한 성수동과 꽤 가깝지만, 송정동은 그 흐름에서 소외돼 보였다.
1유로 프로젝트는 그 '뭐'를 채우고자 하는 플랫폼이다. 코끼리빌라에 입주할 브랜드를 공개 모집하자 76개 브랜드가 신청했고, 그중 17개 브랜드를 엄선했다. 선정 기준은 "좋은 세상과 좋은 도시는 좋은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좋은 사람들의 건강한 결정이 모여 만들어 나간다"라는 1유로 프로젝트의 슬로건이다. 월세와 보증금이 없고 수익도 온전히 가져갈 수 있지만, 나름의 규율이 있다. 최성욱 대표는 이 플랫폼의 브랜드 경험이 "사람들의 삶이 실질적으로, 긍정적으로 바뀌는 일"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라이프스타일'을 이야기하는 가게들이 1유로 프로젝트에 모였다. 도시에서 누구나 정원 하나씩 품으면 좋겠다는 서울가드닝클럽, 강릉 서퍼의 거점으로 시작해 자유와 비-일상의 프로그램을 추구하는 위크엔더스, 자연주의와 명상으로 피부를 건강하게 가꾸자는 핑크원더, '더 나은 지구가 더 나은 우리를 만든다'는 베러얼스 등등. 커피 한 잔을 팔더라도 좋은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며 팔자는 것이 1유로 프로젝트의 철학이다.
지난 9월은 코끼리빌라에 17개 브랜드가 처음 모인 지 1년이 된 달이었다. 그동안 코끼리빌라 3층 거실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반상회가 열렸고, 17개 브랜드는 이곳에서 1유로 프로젝트의 내일을 위한 결정을 내렸다. 그러다 보니 송정동에서는 이제 "매주 뭔가가 일어난다". 방학을 맞은 어린 자녀와 벌레 퇴치용 모빌 만들기, 카페 같은 주방과 편집샵 같은 옷방 꾸미기, 주말 아침 반려견과 더 깊게 교감할 수 있는 요가하기…. 플로깅(조깅하며 쓰레기 줍기)은 거의 일상이 됐다.
1유로 프로젝트는 이미 꽤 유명세를 탔다. 소셜미디어에선 팔로워 수천 명이 붙었고, 사업적으로 접점을 만들어 보려는 기업과 도시재생 참고사례를 찾는 지방자치단체 여러 곳이 문을 두드렸다. 대전, 청주, 제주 등 각지에서 '로컬'에 관심 있거나, 자신의 부동산 활용 방안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몰려온다. 다만, 이것으로 1유로 프로젝트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송정동에 뭔가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됐지만, 아직은 지역사회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더 많이 찾는 장소로 보인다.
'셀럽', '힙스터' 혹은 'MZ'의 즐겨찾기 목록에 오른 건 분명 성과이지만, 1유로 프로젝트의 궁극적 목표는 3년짜리 팝업(Pop-Up)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동네 인프라다. 1유로 프로젝트가 설정한 성장주기가 7단계까지 있다. 세상에 알려지고 안정적 운영 체계를 만드는 4~5단계까지는 1년 만에 왔다. 7단계 프로젝트 마무리 전 사실상 최종 단계인 6단계는 '지역 네트워킹', '커뮤니티 호텔'이다. 마치 고급 아파트에서 입주민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듯, 지역사회에 필요한 서비스를 공급하는 거점이 되는 것이 1유로 프로젝트의 꿈이다. 여기까지는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1유로 프로젝트와 공공 도시재생 사업의 지향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도시재생 사업은 지자체가 무상으로 임대한 '앵커(거점) 시설'을 중간조직이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용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형태였다. 순수 민간영역에서 출발한 1유로 프로젝트는 지역사회보다는 더 넓은 범위를 겨냥한다는 차이점이 있는데, 지역사회 내에서 가능한 역할만 봐도 몇 가지 강점이 두드러진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각 브랜드가 역시 자발적으로 아이디어를 낸다는 점에서 더 풍성하다. 그러면서 동네의 수요에 더 유연하고 더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개성 넘치는 브랜드가 모였지만, '1유로 프로젝트'란 이름 아래 같은 방향성을 띠기 위해 부대끼는 과정을 거친다. 새 브랜드가 입주하면 3개월 동안 코끼리빌라 공동체에 녹아들 수 있는지 판단하는 일종의 수습 기간을 갖는다.
지금은 1유로 프로젝트가 그런 강점을 시험하는 시기다. 당초 목표에 어긋나게 활동한 일부 브랜드가 떠났고, 새 브랜드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코끼리빌라 1층에는 큼지막한 문을 새로 냈고, 카페테라스 같은 마당도 만들었다. 무슨 신생 기업인 줄 알고 기웃기웃하다 발걸음을 돌리는 송정동 주민들을 향해 손짓하는 공간이다. 2023년 3월 문을 연 이후 6개월 만에 찾아온 '시즌 2'의 타깃 고객도 여전히 송정동 주민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지금 셀럽, 힙스터, MZ들만큼이나 코끼리빌라의 존재를 뿌듯해해야 한다.
1유로 프로젝트는 오늘도 송정동 골목길을 향해 문을 활짝 열고, "지방의 인구 소멸 등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착한 부자’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회사, 착한 부동산 개발회사"가 되는 꿈을 꾼다.
*따옴표 안은 모두 최성욱 로컬 퓨처스 대표의 말(2023년 9월 24일 오후 2시 1유로 프로젝트 토크콘서트)입니다.
*참고자료
이혜운, 「임대료가 3년에 1유로! 착한 건물주와 꿈꾸는 건축가가 만든 기적」, 『조선일보』, 2023년 4월 8일
박은경, 「도시재생은 시민 손으로…‘1유로의 기적’은 어떻게 이뤄졌나」, 『한겨레신문』, 2019년 8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