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nderer Apr 02. 2020

어린아이

어린아이 같은 어른 되기

며칠 전 성경을 읽다 오히려 세상을 가장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건 어린아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렸을 적 "종종 어린애가 뭘 알아?"라는 어른들의 장난스러운 질문을 듣곤 한다. 어려서 몰라도 되는 나이는 대체 언제까지일까? 어떤 때가 되어야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진정으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유치원 때 으레 하나씩 생기는 남자 친구 이야기를 식탁에서 조잘조잘 이야기하면 어른들은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너가 벌써 사랑을 알아?”라고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어른들은 아이들이 말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일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 고차원적이라 내가 그 의미를 충분히 알기엔 어리다고 생각했을까? 

 

그때 내가 그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이유는

내가 맛있는 것을 먹을 때 그 친구와 함께 나눠 먹고 싶었던 마음이 들었던 것. 

제일 좋아하는 놀이공원에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그리고 그 친구가 내 유치원에서의 하루를 즐겁게 또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 그뿐이었다. 

 

나는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와 모습에 충실했던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너에게만은 기꺼이 나누고자 했던 그 마음. 누군가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했던 그 마음.’

그 안에는 어떠한 조건도 어떠한 제약도 계산도 없이 순수했던 그 마음만 있었다. 

 

아이들은 어쩌면 세상의 많은 것들의 태곳적 순수함, 그리고 그 속의 본질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수많은 어른들보다 어쩌면 사물을, 상황을, 사람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그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무리 중 누군가 '누가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한 어린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이가 천국에서 큰 이’라고 말씀하셨다. 

 

처음 이 말씀을 읽었을 땐 예수님의 세계에선 세상에서 보는 작은 것들이 오히려 하늘에서 보기엔 더 크고 위대한 것임에 위안을 받았다. 

 

하지만 위안 뒤에 따라오는 마음속에 묵직함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지 않았을까.  아마 예수님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주변의 것들에 편견 없이 반응하던 순수함이 내가 손을 쓸 새도 없이 혼탁해져 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겠지. 

 

한때 티비를 안 보는 나에게도 익숙할 정도로 Sky캐슬이라는 입시(?)를 다룬 드라마가 연일 화제에 오르내렸다. 드라마와 별반 다르지 않은 우리 현실 속에서도 작은 것의 위대함을 모르는 어른들의 무지함과 욕심 속에서 많은 아이들이 속수무책 그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로 언제로 돌이켜야 할지 감도 안 올 만큼 멀리 와있지만 그럼에도 부단히 돌이켜 다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많은 어린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그 크고 위대한 순수함을 잃지 않도록 묵묵하게 지켜주는 세상에 하나쯤 있으면 좋을 법한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