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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Jan 02. 2021

아포 국민학교

선생님은 내 재능을 알아봐 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아포 국민학교



나는 구미와 김천 사이에 있는 '아포'라는 동네에 살았던 적이 있다.

아빠는 방송국에 다녔고, 회사는 신입 직원들을 2년 혹은 4년마다 지역을 돌며 로테이션 근무를 시켰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녔다.


대구에서 아포로 이사하고 몇 년 뒤,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살던 과수원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차가 없으면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말은 학교지만 거의 분교에 가까운 아포 국민학교라는 곳으로.


희미하게 남은 기억을 빌려 아포 국민학교의 겉모습을 표현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학교 건물은 일층이 전부였다. 한 건물에 일 학년부터 육 학년까지 모든 학생들이 있었고 건물의 규모에 비해 운동장은 넓었다. 운동장 한구석에는 낡았지만 쓸만했던 그네, 시소, 미끄럼틀 같은 것이 있었고 울타리 안쪽으로는 무궁화 나무, 달개비꽃, 도깨비바늘 같은 것들이 일정한 질서를 지키며 자라고 있었다. 비싸고 좋은 잔디 같은 건 없었다. 아포 국민학교는 조그맣고 돈도 없는 학교였다.


나는 1학년 2반이었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한 학년에 두 반까지만 있었기 때문이다. 한 반에는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고 때문에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단짝이랄 것이 필요 없었고 때문에 왕따라든가 외로움이라든가 같은 단어들은 우리 사이에 통용되지 않았다. 니 자리 내 자리도 없었다. 아침에 등교를 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가 내 자리다. 종이 치고 조금 기다리면 선생님이 들어오신다. 젊고 예쁘고 안경을 낀 여자 선생님. 이름은 김명선. 나는 학창 시절 나를 거쳐간 선생님들의 이름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지만 이 선생님이 유독 선명히 남은 데는 이유가 있다. 김명선 선생님은 내게 글 쓰는 방법을 알려준 첫 번째 스승이다.



아포 국민학교에 다니는 동안 우리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물론 정규 과정에 따라 국어나 산수 같은 것들을 배우기야 했겠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무궁화 씨를 채집한다거나, 애벌레를 잡아다 나비가 되는 과정을 관찰한다거나, 달개비 꽃의 색이 무엇인지, 아카시아 나무에서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는 일 같은 것들이다.


수업은 주로 교실에서 했던 것 같은데 교실이 아닌 곳에서도 우리는 배웠다. 선생님은 근처 산 같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도토리 열매는 어떻게 생겼는지, 활엽수와 침엽수의 생김은 어떻게 다른지 같은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나뭇잎이 넓적하거나 뾰족하거나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동그란 도토리만 쫓아다니느라 눈과 몸이 바빴다. 동그랗고 통통한 도토리가 보이면 냅다 달려가 주머니에 넣었고, 그렇게 바지가 터질 만큼 모이면 빈 깡통을 주워다 조심스레 모아 넣고는 가장 은밀하고 안전해 보이는 장소에 숨겼다. 그리고 이 산에서 가장 배고프고 마른 다람쥐가 꼭 이 깡통을 발견하길 바랐다. 도토리는 다람쥐의 가장 좋은 먹이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아포 국민학교에서 배웠다.


아카시아 나무는 어린 우리들에게 좋은 놀잇감이었다. 향기를 쫓아 걸어가 보면 어김없이 하얀 꽃을 피운 나무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키가 낮은 놈을 선택해 우리는 꿀을 따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맛은 안 났던 것 같은데 그런데도 우리는 누가누가 꿀을 더 많이 먹나 내기라도 하듯 아카시아 꿀을 빨았다. 그 나무로 할 수 있는 것은 또 있었다. 아카시아 나뭇잎은 '된다' '안 된다' 놀이를 하기에 아주 좋게 생겼다. 가운뎃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 대칭으로 자라난 아카시아 나뭇잎은 어린 국민학생들에게 좋은 장난감이었다. 적당한 부위를 잡고 나무줄기를 꺾어 잡은 뒤 친구들과 자주 내기를 했다.


"된다가 나오면 내가 이기는 거, 안 된다가 나오면 니가 이기는 거데이"


그렇게 나뭇잎을 하나하나 떼어내며 된다, 안 된다를 하는 동안 머리 좋은 어떤 아이는 눈대중으로 미리부터 결과를 예측하고 에이, 하거나 아싸!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내기에서 지면 칠판을 지운다거나 쓰레기통을 비우는 식으로 대가를 치렀다. 우리가 이렇게 노는 동안 선생님은 뭘 하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저 산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신났고 솔직히 말하면 이런 것들이 교실에서 하는 어떤 것들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교실에서 했던 활동 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시를 쓰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에게 동시를 쓰게 했다. 월요일에 주제를 준 뒤, 수요일까지 글을 써오고, 금요일에는 그 글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주제는 매번 달랐다. 어떤 날은 눈사람, 어떤 날은 가족. 강아지. 버스. 사랑. 행복. 같은. 우리는 모두 다른 글을 썼고 때문에 금요일에 제출하는 그림 역시 제각기 달랐다. 누구는 화려하게. 누구는 우중충하게. 또 누구는 세상 평범하게. 우리가 쓴 글이나 그림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교실 뒤편 미화 게시판에 전시되었다.

하루는 겨울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선생님이 짧은 칭찬을 했다. 내가 뭐라고 썼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장면만큼은 선명하다. 선생님의 표정. 말투. 그리고 긍정적인 고갯짓과 대사.


"현지는 참 글을 잘 쓰는구나."


솔직히 큰 감흥은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내게 글 재주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여덟 살은 재주라든가 재능이랄 것을 생각해 볼 나이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선생님이 내주는 동시 숙제는 너무너무 귀찮았지 않았던가. 그런 대충 쓴 글에 대한 코멘트였기 때문에 그저 '오늘 숙제는 통과했어' 정도의 의미로만 다가왔다. 선생님의 칭찬이 진짜 칭찬이었음을 느낀 건 3년 뒤, 다른 학교에서 다른 선생님의 입으로 같은 말을 다시 들었을 때였다. 이제는 안다. 김명선 선생님은 내 재능을 알아봐 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아포 국민학교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반년이다. 1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 아빠의 순환 근무가 끝났고, 우리 가족은 다시 대구로 돌아가야 했다. 아포를 떠나는 날. 선생님은 반 아이들을 시켜 내게 편지를 쓰게 했다. 두 줄. 혹은 세 줄짜리 짧은 편지. 그것들을 소중히 품에 안고 나는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다시 만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도 어려운 일인지 알았더라면 나는 안녕히 계시라는 말 대신 이렇게 말했을 텐데.

다음에 또 봐요 선생님.


아포에서 보낸 시간은 아주 짧지만 김명선 선생님의 수업과 매주 써야 했던 글, 산, 꽃에 대한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나는 그때 형성된 정서와 기억들이 현재의 나를 이끄는 한 부분임을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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