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것이 처음이고 진짜 사랑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2층 테라스는 하이랑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방보다 넓은 탁 트인 공간에는 빨래 건조대와 의자와 화분이 있었다. 누와라엘리야는 가는 비가 자주 내렸기 때문에 이모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테라스로 뛰어올라왔다. 손님들이 널어놓은 빨래는 이모의 관심과 체력을 먹고 잘 말랐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자주 테라스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의자 위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노트북도 하고 간식도 먹고 히란이랑 이야기도 했다. 히란은 담배를 피고 싶을 때마다 2층 테라스로 올라왔다. 2층에는 사람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경치가 좋다. 담배 피는 히란 옆에서 나는 일을 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히란이 해주는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그가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히란 자신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아무리 우스꽝스럽거나 슬픈 이야기라도 나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테라스에 앉아 쉬고 있는데 누가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왔다. 히란인 줄 알고 안을 들여다 봤는데 처음 보는 손님들이었다. 키가 큰 여자와 키가 아주 큰 서양 여자. 여자들은 나를 소파에 나를 등지고 앉아 떠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있는 줄은 모르는 것 같았다. 어느 나라 사람일까. 말에 높낮이가 있고 입안에서 바람소리가 많이 나는 걸로 봐선 프랑스일 것 같았다.
실컷 대화를 하던 여자 둘은 갑자기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나는 그대로 굳었다. 이제 와서 있는 척할 수도 없었다. 의자에 완전히 기대지도 허리를 세우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숨을 죽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나무의자에서 삐걱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배랑 다리랑 목 근육이 아팠다. 젠장. 안 보는 건 할 수 있어도 안 듣는 건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많이 곤란했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는 축축하면서도 야했는데 큰 소리가 아님에도 어쩐지 창문을 뚫고 테라스까지 들렸다. 셋이 있지만 둘만 있는 그들은 하이랑카에서 가장 조용한 2층 로비에서 오래오래 키스를 나눴다.
살면서 첫사랑 이야기를 할 기회는 왕왕 있었다. 여행작가인 나는 강연을 들으러 온 청중에게, 막역한 친구들에게, 그리고 지난 연인들에게 내 처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상대는 자주 변했다. 어떨 때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짝궁이라고 했다가, 어떨 때는 중학교 1학년 때 200일 사귄 남자친구라고 했다가, 또 언제는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성당 오빠라고도 했다. 민망한 상황을 피하고 싶을수록 대과거적 이야기를 했다. 초딩때 풋사랑 썰을 풀면 청중은 실망했지만 남자친구들은 높은 확률로 안심했다. 과거란 오래된 것일 수록 지루하면서도 안전하니까. 소녀적 이야기에 발끈할 남자는 거의 없고 현재와 그때의 시간적 거리가 멀 수록 싸울 일은 줄어든다. 너무 옛날 이야기는 그래서 좋다. 말하는 이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무해하다. 마지막 사랑에 대한 질문 보다 첫 사랑 질문이 훨씬 편한 이유다.
내 첫사랑의 상대는 자주 바뀌지만 거짓말한 건 아무것도 없다. 정말로 그들은 나의 첫사랑이니까. 나는 11살 때 허OO 라는 남자애를 좋아했고, 14살 때 한XX 이라는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으며, 17살 때 문□□ 라는 성당 오빠를 좋아한 게 맞다. 단지 언제가 '처음'이고 누구를 정말로 '사랑'했는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아마 그건 사랑이란 정서의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아닐까. 스타트를 어디서부터 끊어야 할지도 헷갈린다. 정식으로 합의하에 한 교제를 처음으로 쳐야 할지, 짝사랑까지 포함인지, 아니면 10대 때 풋사랑은 빼고 성인 때부터 카운팅 하는 게 맞는 건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남들에게 말할 수 있을만한 첫사랑 상대 1,2,3호를 정해놓고 상황에 따라 골고루 써먹는다.
그렇다면 남들에게 말할 수 없을만한 사람까지 포함시키면 어떨까. 그렇다면 내 상대는 한 명 더 는다. 열여덟 살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첫사랑 4호다.
4호는 운동을 잘했다. 달리기도 잘 하고 핸드볼도 잘 하고 심지어 담도 훌쩍훌쩍 잘 넘었다. 나는 4호를 온 열과 성을 다해 좋아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4호를 보려고 토요일에도 야자를 했고, 단발이 좋다길래 머리도 잘랐고, 4호의 번호가 20번이었다는 사실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할 정도로 좋아했다. 정말이지 나는 4호 덕분에 학교가는 게 즐거웠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가 열 여덟살 때 담임 선생님은 1년 내내 단 한 번도 자리를 바꾸지 않으셨다. 그래서 21번이었던 나는 한 해가 다 가도록 20번이었던 4호의 등을 보며 살았다. 내가 4호를 좋아하는 만큼 4호도 나를 좋아했다. 좋아한다고 말로 한 적은 없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끼고 음악을 들었다. 4호는 연습생 제의를 받을 만큼 노래를 잘 했는데 그래서 틈만 나면 무반주로 노래를 불러줬다. 버즈와 SG워너비가 가요계를 평정하던 시대였다. 그 애의 목소리는 무척 좋았기 때문에 나는 자주 잠에 빠져들거나 화들짝 깨곤 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있다보면 어느새 종이 치고 하루가 갔다.
4호와 나는 손도 자주 잡았다. 복도를 걸을 때나 체육관으로 이동할 때, 1교시 시작 전 매점으로 뛰어갈 때도 잡았다. 손 잡는 친구는 4호 말고도 많았지만 4호와는 남들이 안 볼 때만 잡았기 때문에 퍽 비밀스런 기분이 되었다. 우리는 남들 몰래 하는 것들이 많았다. 남들 모르게 먹고 몰래 듣고 또 몰래 만나 몰래 놀았다. 특별한 것에 환장했던 열여덟의 서현지는 4호가 있어서 학교가는 게 매일 좋았다.
그러다 가을쯤이었나. 다른 친구 하나가 장난을 쳤다.
"야, 너네 사귀냐?"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과장되게 펄쩍 뛰었다.
"뭔 그딴 소릴 하냐. 돌았어?"
나는 4호와 사귄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같이 있으면 좋을 뿐이었다. 4호와 나는 사귈 수 없었다. 우리는 둘 다 여자였고 그건 의미하는 바가 너무 컸다. 손가락질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던 시절이었다. 루머의 주인공이 되는 건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절대 그럴리 없다고 소리쳤다.'절대'라는 말에 4호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면서도 나는 그랬다.
그날 이후로 4호가 불편해졌다. 나는 이 애를 좋아했지만 절대로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 그래서 자주 주문을 걸었다. 우리는 친구다. 너랑 나는 친구다. 침 삼키는 것도 한 번 의식하면 쭉 신경쓰이는 것 처럼 4호가 내겐 그랬다.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것들에 자꾸 의미를 붙이기 시작하니 예전처럼 편할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자꾸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됐다. 이상해 보이지 않겠지. 누가 또 이상한 장난치는 거 아니겠지.
내가 그러는 동안에도 4호는 그대로였다. 여전히 미디움 템포 음악을 들려줬고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말했고, 가고 싶은 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4호는 여전히 예뻤고 여전히 운동도 잘하고 착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4호가 두려움과 동시에 나는 안도했다. 너는 변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너는 항상 그대로구나. 내 멋대로 판단하는 실수를 했다.
우리의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몰랐을 때다. 모두의 눈치를 보느라 남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동안 이 애와 내가 더이상 20번과 21번일 수 없는 열아홉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정말로 몰랐던 때였다.
4호와 나는 열아홉이 되자마자 사귄 적도 없이 헤어졌다. 4호가 나를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애는 나만 보면 피했고 전화나 문자에도 답하지 않았다. 4호를 만나기 위해 여러 날 옆 반을 찾아갔지만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내가 찾아갈 때마다 그 반 애들은 나를 걱정하면서도 귀찮아했다. 마음은 알겠지만 이제는 그만 찾아오라고도 했다. 내 맘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안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자주 울었다. 가슴이 뜯겨질 것 같기도 했고 쥐어짜는 것 같기도 했다. 서늘하거나 뜨거운 바람이 불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그애랑 나눴던 것들이 스르륵 밀려왔다가 훅 사라졌다. 생각은 머리로 하는데 왜 가슴이 아픈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 정도로 아픈데 가슴이 파랗게 멍들지 않는 건 거의 신기했다.
다행히 나는 4호를 빨리 잊었다. 고3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열아홉은 아주 바쁘기 때문에 4호는 그리워하는 빈도를 점점 줄여가는 방식으로 잊혀졌다.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준 일이기도 했다.
많은 종류의 사랑을 해봤지만 어느 것이 '처음' 이고 '진짜' 사랑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뤄지지 않은 사랑도 포함시킨다면. 애매모호한 결말도 괜찮다면. 아무것도 아닌 상태의 마지막도 괜찮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1층으로 내려왔다. 히란이 숙박비를 정산하다가 까딱 눈인사 했다. 히란을 지나쳐 주방으로 갔다. 별관쪽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를 꺼냈다. 시리얼을 챙겨 먹고 타운으로 나가 장을 봐야지. 매일 장을 보는데도 식재료는 너무 금방 떨어졌다. 그러고보니 하이랑카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 슬슬 이동 할 준비를 해야할까. 고민하는 건 귀찮기 때문에 일단 뭔가 먹기로 했다. 우유를 그릇에 붓는데 등 뒤로 여자 두 명이 지나갔다. 입에서 바람소리가 나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히란과 인사하고 현관을 나섰다.
격자무늬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이 불투명하게 보이다 이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