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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Oct 31. 2020

18. 잠깐일 줄 알았던 스리랑카

인생에서 고작 60일쯤이야


잠시 스리랑카로 가기로 했다


잠시 스리랑카로 가기로 했다. 남인도는 너무 덥고, 힌두 사원이나 모스크고 지겹고. 새로운 걸 잠깐만 하고 싶었다. 아 그래, 스리랑카가 있었지. 잠시만 다녀오자. 그렇게 시작된 걸음이었다. 


관광 책자에서 누와라엘리야에 대해 읽었을 때 '시원한 곳'이라는 표현이 제일 마음을 후려쳤다. 시원하다 못해 춥기까지 한 고원지대라 현지인을 사이에서도 휴가지라고. 새벽이면 산에서 내려온 차가운 공기 때문에 발이나 어깨가 시린 경우도 있다고. 춥다. 차갑다. 시원하다는 표현은 듣기만 해도 체온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에어컨 없이는 5분도 견디기 힘든 더위에 취약한 여행자는 고민 않고 바로 표를 예약했다. 누와라엘리야로 가는 버스표는 하루에도 아주 많았다. 


버스가 산을 오를수록 경사가 가팔라졌다. 평지를 달리던 버스는 점차 속도가 느려지더니 나선형 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산세도 험해져 각도가 안 나오는지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다. 사람이 아주 많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차체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승객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마구 흔들렸고 위로 올라갈수록 티가 나게 추워졌다. 현지인들은 가방에서 가디건이나 재킷을 꺼내 걸쳤다. 담불라에서 민소매 상태로 버스에 오른 나는 턱이 덜덜 떨렸다. 두터운 가디건은 배낭 안에 있었고 배낭은 사람들이 던져 놓은 짐 속에 파묻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와라엘리야는 그렇게 춥고 높은 곳에 있었다. 



함께 스리랑카를 여행하던 한국인이 떠나고 혼자가 되었다. 누와라엘리야 날씨에 대한 정보는 진짜였다. 침대에 누우면 코와 어깨가 시렸고 때문에 아침마다 드라이기를 꺼내 몸을 녹였다. 알리바바 바지 안에 레깅스를 덧 입고 두꺼운 후드티 안에도 반팔 셔츠를 한 겹 더 입었지만 아침마다 이불을 걷으며 몸을 떨었다. 해가 쨍쩅한데도 이렇게 추울 수 있다니. 산이 내뿜은 공기는 온통 차가웠고 그러면서도 오래갔기 때문에 조식으로 나온 수프를 먹어도 한기가 멎지 않았다. 그 핑계로 샤워는 이틀에 한 번만 했다.


숙소에는 일본어와 영어를 할 줄 아는 주인이 있었다. 일본에서 5년 동안 회계사로 일한 적 있는 주인은 동아시아인들을 좋아했고 무엇보다 첫 한국인 손님인 나를 살뜰히 챙겼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도 계속 일을 했는데 한국 시간에 맞춰 원고 작업을 했기 때문에 늘 새벽에 잠들고 이른 오후나 되어서야 일어났다. 주인은 조식 시간을 번번이 놓치는 한국인 손님을 위해 바나나나 빵 같은 것들을 1인분씩 미리 빼두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그가 챙겨둔 밀가루 음식을 씹었고 스리랑카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실론티를 마시며 서서히 하루를 시작했다. 홍차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우유와 설탕을 살짝 타 마시면 전혀 다른 맛이 났다. 첫 맛은 쓰지만 끝 맛은 달았다. 주인은 내가 머무는 동안 홍차를 조금 더 맛있게 마시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찻잎을 따는 시기와 보관 방법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맛이 날 수 있음을 나는 그를 통해 처음 알았다. 



주인과 매니저는 내가 글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임을 알자마자 2층 로비에 테이블을 놓아주었다. 콘센트와 맞붙은 테이블은 일하기에 아주 좋았고 그가 제공한 마우스 패드 덕분에 콘텐츠 작업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나는 글을 쓸 때 누가 쳐다보고 있는 걸 아주 싫어했는데 어쩐지 주인과 매니저만큼은 괜찮았다. 어차피 그들은 한국어를 몰랐다. 두 사람은 자판을 두들길 때마다 가로로 척척 생성되는 한글에 무럭 관심을 보였다. 

너 타자 속도가 장난이 아니구나


나는 한글 자모음 체계가 키보드로 쓰기 편하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맞다. 자랑이었다.

회계사지만 글 쓰는 것도 좋아하는 주인은 내가 작업을 할 때마다 옆에서 홍차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웠다. 그러면서 알아먹지도 못할 것들이 우르르 쓰이고 있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옆에 누가 있기 때문인지 일하는 동안은 딴짓을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곁에 있는 동안 원고는 빠르게 완성되었고 덕분에 그들과 보낼 여유 시간 역시 많아졌다. 역시, 감시하는 인간이 있어야 일을 하는군. 덕분에 누와라엘리야에 있는 동안은 단 한 번도 원고 마감을 미루지 않았다. 




주인과 나는 자주 테라스에서 빨래를 널거나 담배를 피웠다. 스리랑카 담배 냄새는 한국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시가 같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가 가진 담배를 바꿔피거나 뺏어 피면서 오후 시간을 보냈는데 그는 그 시간을 꽤 좋아하는 것 같았다. 대화 빈도가 잦아질수록 나는 오늘은 어떤 진상 손님이 왔는지, 어느 나라에서 온 인간인지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습득했다. 그래서 가끔 그 혼자 처리하기 곤란한 손님이 오면 내가 대신 나서줄 때도 있었다. 주인이 가장 난처해하는 손님은 주로 인도인들이었다. 인도와 스리랑카는 사이가 아주 안 좋았고 때문에 간혹 돈 많은 인도 손님들이 주인과 직원들을 대놓고 무시할 때가 있었다. 돈을 던진다거나, 시끄럽게 군다거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며 트립어드바이저 평점을 깎아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을 하거나. 그럴 때 내가 대신 나섰다. 

너무 시끄러운데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식사 후에는 설거지를 셀프로 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먹히지 않으면 최후의 방법을 썼다. 


"저는 인도가 좋아서 책까지 쓴 적이 있는데 당신들을 보니 모든 인도인들이 다 선한 건 아닌가 보네요."


이렇게 나오면 그들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은 시키는 대로 했다. 내 나라 욕 먹이는 짓은 누구라도 선뜻하기 힘든 일이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헤헤 웃었다. 지아, 니가 최고야. 응, 나도 알아. 어느새 우리는 눈빛만으로도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대신 물리치는 손님은 인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주방 이모님은 현지어 외에 다른 언어는 전혀 할 줄 몰랐는데 때문에 컴플레인에 자주 시달렸다. 그녀는 휴지, 화장실, 세탁기 같은 기본 단어조차 영어로 알지 못해 손님들에게 자주 혼났고 주인이나 매니저가 없을 때 손님과 시비가 붙으면 곧장 내방으로 달려왔다. 쾅쾅쾅 소리가 나 문을 열어보면 어김없이 그녀가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서 있었다. 나는 그녀 대신 서양인들에게 사과를 하거나 물을 가져다주거나 담요나 수건 같은 것을 챙겨주며 고개를 숙였다. 대부분은 수긍했지만 몇몇은 욕을 하거나 삿대질을 하기도 했다. 화난 이들은 너무 빨리 말했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의 영어 욕을 알아듣지 못했고 때문에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이모는 그런 내 뒤에서 울거나 발을 동동 굴렀다. 

몇 번 이런 일이 반복되자 손님들은 내가 직원이라고 생각한 건지 나를 볼 때마다 이것저것을 요청했다. 


뜨거운 물이 안 나오는데요

테라스에 불이 안 켜져요

혹시 아이폰 충전기 남는 거 있을까요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은 대체로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들이었고 때문에 나는 직원이 아니라는 설명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주인은 눈코 뜰 새없이 바빴고 매니저는 서비스 마인드가 장착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필요한 것을 말하면 '여긴 원래 그런 거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온수기를 켜주고 테라스 전구 위치를 바로잡고 개인용 아이폰 충전기를 건네는 것으로 나는 대부분의 컴플레인을 해결했다. 그러다 보니 미안합니다, 불편하셨죠, 얼른 고쳐드릴게요,라는 말은 어쩐지 매일 내가 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주인은 방값을 알아서 깎아주는 것으로 보답했고 그러면서 웬만하면 이곳에 오래 묵어주었으면 하는 티를 냈다. 아무래도 나는 이곳에 도움이 많이 되는 인간인 것 같았다.




그의 바람 때문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누와라엘리야를 조금 늦게 떠나기로 결정했다. 살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었고, 떠날 계획을 세우는 것을 조금 미루는 방식으로 방에 남기로 한 것이다. 여기는 덥지도 않고 맛있는 것도 많고 방값도 할인해 주니까. 핑계였다. 사실은 이곳 직원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주인과의 담배 타임, (일은 못 하지만)불심이 깊고 친절한 매니저, (영어는 못 하지만)친딸처럼 챙겨주는 주방 이모. 나는 정에 약하고 늘 이별이 두렵다. 아무리 여행을 지속해도 고쳐지지 않는 일종의 천성 같은 것. 이들과의 끝을 떠올리는 건 슬펐고 때문에 홀로될 시간을 감당할 자신이 없음을 일찌감치 알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을 유예하는 것으로 허물어질 뻔한 마음을 지켰다. 떠나지 않기로 결정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주인과 매니저와 이모도 그런 것 같았다. 


누와라엘리야는 지대가 높기 때문에 기온이 낮고 비가 자주 왔다. 내가 머문 숙소는 비싸고 튼튼했기 때문에 어느 층에서든 안전했지만 누와라엘리야의 모든 가정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나라나 빈부격차는 있었고 이곳에도 테라스가 달린 좋은 집들 사이로 슬레이트나 지푸라기를 지붕 삼아 덮고 사는 가난한 이웃이 많았다. 

그들은 다양한 종류의 고통에 시달렸다. 

추위. 악취. 배고픔. 홍수. 

비가 오면 바닥이 아예 물에 잠기는 몇몇 집들은 장판을 아예 깔지 않은 채 생활했고 비가 그치고 나면 온 가족이 바가지를 들고 물 퍼내는 작업을 했다. 돈이 아주 없는 사람들은 집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수준의 공간에서 생활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에는 할아버지 혼자 사는 집에 원인 모를 불이 나 뜬금없이 소방 작업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런 집들은 대부분 나무나 합판 같은 걸로 지어졌기 때문에 한 번 불이 나면 옆집으로, 그 옆집으로 순식간에 피해가 번질 수 있다.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바가지와 빈 PT병 같은 것을 들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구덩이로 마구 물을 퍼 넣었다. 그러는 동안 온몸이 젖고 발가락 사이사이로 모래가 비집고 들어왔다. 연기는 너무 매웠기 때문에 얼굴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 이물질이 마구 나왔지만 아무도 바가지질을 멈추지 않았다. 누와라엘리야에서 바가지는 물도 불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처럼 느껴졌다. 



내가 나서야 하는 상황은 여러 곳에서 자주 발생했다. 누와라엘리야에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스리랑카인들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20대 성인이었는데 하나같이 한국에만 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여겼다. 


한국에 가고 싶어요. 

5년만 고생하면 집 살 수 있어요. 


희망에 찬 눈빛들을 마주할 때마다 내 나라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을 떠올렸다. 손쉽게 기피 대상으로 분류되던 그들의 얼굴을.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지만 한국인보다 적은 돈을 받는 그들을. 법의 보호를 덜 받으면서도 목숨 걸고 일해야 하는 환경을. 나는 한국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곳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똑같이 힘들고 어렵게 일할 거면 여기보다 돈을 더 주는 곳에서 일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말에 어쩐지 설득당하고 말았다. 스리랑카에서는 한 달을 꼬박 일해도 30만 원 남짓을 벌지만 한국에서는 적어도 200만 원을 번다고. 그러면서 숙소도 있고 밥도 준다고. 우리 아직 어려요. 한국 가면 돈 많이 벌어요. 돈 벌어서 집도 사고 차도 사요. 이런 마음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 가기 위해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은 언어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쳐본 적 있는 나는 스리랑카에서도 교육 봉사에 참여했다. 한국어 시험은 무지막지한 데가 있기 때문에 모국어 화자로서 자주 한숨을 쉬었다. 출제자는 참새가 '꿀꿀' 우는지 '삐걱' 우는지 '짹짹' 우는지를 문제로 내놓고 배점을 무려 3점으로 책정해놨다. 잘못 삐걱했다간 정말 새될 수 있는 문제들을 만날 때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얘들아. 의성어 의태어 문제는 그냥 찍자"


그거 외울 시간에 다른 유형을 공부하자. 그게 효율적이야. 뭐 저런 선생이 다 있냐는 눈을 하고서도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은 주로 말하고 듣는 식으로 진행했다. 나는 학생들이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말하되 최대한 한국인이 말하는 한국어처럼 발음하도록 애썼다.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줄임말과 사투리 사용을 줄이는 것이다. 페북. 개 피곤. 잠 온다. 학생들은 내가 친구와 통화를 할 때조차 눈과 귀를 열어두고 있었다. 몇몇은 내가 한 말을 적어두었다가 쉬는 시간에 질문을 했는데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아'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오 마이 갓. 문장을 '머리가 아프다'로 정정해 주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신 차리자. 제발. 




아는 사람이 늘고 머무는 날이 길어질수록 스리랑카에서의 일상은 바빠졌다. 한국에 있는 절친 L은 그 시골 동네에서 뭐가 그리 바쁘냐고, 쉬러 간 것 아니었냐며 놀렸는데 나는 L에게 그건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하루하루가 스펙타클에 복잡다단하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하루는 방에 들어온 나방을 잡아 죽이려다 불교 신자인 매니저에게 걸려 혼났고, 어느 하루는 학생 집에 초대받았다가 뭔가를 얻어먹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정전이 이틀째 지속된 날에는 온수기마저 먹통이 되어 이틀 동안 씻지 못했고 그 일의 연장으로 손님들의 항의를 듣느라 혼이 쏙 빠졌다. 술이나 약에 찌든 몇몇 서양 손님들은 자주 사고를 쳤는데 어느 날 밤 두 남녀가 도미토리에서 대놓고 그것을 하는 바람에 숙소가 발칵 뒤집혔다. 동네 인도 출신 할아버지는 인도가 파키스탄과의 크리켓 결승에서 끝내 패하자 분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할아버지와 각별했던 주방 이모는 그 일로 무단 결근을 했다. 이모가 없는 동안 나와 주인은 감자와 당근을 깎거나 빵을 굽는 등 모든 조식 준비를 대신했고 그런 와중에 햄버거를 잘못 사먹었다가 응급실에도 실려갔다. 


여행이 생활이 되면서 그간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무럭 겪었다. 스리랑카의 내전과 가난, 인종 갈등과 종교, 돈이 없어서 겪는 차별과 부를 가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고민 같은 것.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나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았고 스스로의 쓸모를 인지할 때마다 왠지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간 서현지이자 한국에서 온 손님이자 가족이자 선생님이자 친구인 상태로 누와라엘리야에서의 시간은 계속 흘렀고 어느덧 달력을 보니 두 달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주인이 다가왔다. 180cm가 넘는 그가 의자에 기대앉자 삐걱- 소리가 길게 났다. 오래된 나무 의자는 한 번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이런 소리를 냈다. 어휴, 이것도 바꿀 때가 됐는데. 나는 그가 두 달 전에도 같은 말을 했다는 걸 떠올리며 잠깐 웃었다. 왠지 이 의자는 내년에도 계속 이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다. 


"너랑 담배 피울 날도 얼마 안 남았네."


인도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돌아가서 못다 한 남인도 여행을 하고, 남은 칼럼을 쓰고, 그리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겠지. 주인은 섭섭한 표정을 대놓고 지었다. 너만큼 오래 머문 사람도 없었는데. 나만큼 시끌벅적한 손님도 없었겠지. 담배를 바꿔피며 우리는 서로의 말에 동의했다. 울적한데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터졌다. 나는 며칠 전 누와라엘리야 친구들을 위한 기부 전시회를 열었는데 의도치 않게 신문과 뉴스에 크게 보도되는 바람에 영어로 연설까지 했다. 연설장에는 그도 함께였는데 공동 주최자로 이름이 올라가는 바람에 아마 무척 피곤했을 것이다. 손님을 맞이하고, 영어와 신할리로 통역하고, 방송국 PD와 교육청 관계자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모든 일들을 하면서. 그래도 미안한 마음보다 고마운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나는 '땡큐'라고만 말했다. 내가 더 고맙지, 두 달 동안 니가 커버해 준 진상이 얼마나 많은데. 그 때문에 네가 내 방 값을 엄청 깎았지, 살림에 큰 도움이 됐어. 친구인데 그 정도쯤이야. 그의 입에서 'Friend'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는 퍽 좋았다. 열일곱 살 많은 친구라. 그래, 마음 맞으면 다 친구지. 그래 우리는 친구지. 속으로 생각하며 스리랑카산 담배를 조금씩 조금씩 태웠다. 



잠깐 머물려던 여행이 많은 것을 남겼다. 혹시 아쉬운 점이 있나. 누와라엘리야에서 못 가본 곳이 있었던가.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았다. 혹시 있더라도 상관없을 일이었다. 다시 오면 되는 것 아닐까. 문득 떠오를 때. 친구들이 보고 싶어질 때. 돈과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주어졌을 때. 한 나라에서 두 달이란 시간을 머문 것에 대해 잠깐 후회를 한 적도 있었다. 60일. 아시아를 몽땅 투어하고도 남을 시간. 인스타그램 소개글에 'XX개국, XXX 지역을 다녀온 여행작가'라고 조금 더 그럴듯하게 적을 수도 있을 시간. 그 시간과 에너지를 한곳에 몰아넣으며 이게 맞는 선택인가 고민할 때도 물론 있었다. 그런데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60일이 대수일까. '고작'이라고 표현할 만큼 짧은 시간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나는 파키스탄에 갈 수도, 이집트에 갈 수도, 이스라엘과 몰디브에 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럼 됐지. 아 그럼 됐지.


남은 며칠 동안 만나고 싶은 이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많은 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행은, 너무 잘 한 선택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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