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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러라고 했어?

시킨 적 없는 배려

by 리뷰몽땅

"그러니까 할머니 말씀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


세상에 아무도 내 편이 없더라도 한 사람만 내 편이 있다면 성공했다고 하더니 민수는 틀림없이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와의 어이없는 아침 난장판을 보내고 투덜대며 민정에게 하소연을 한 것이 잘못인가? 민정은 입장 바꿔 생각해 보자며 선생님 같은 말을 늘어놓는다. 요즘은 선생님들도 이러지 않는다. 각자도생이다.



"그냥 할머니는 김치통을 떨어뜨린거고 그 모든 상황에 화가 나신거고 그런데 너가 119에 전화하고 뛰어가고 난리였던 거잖아."


듣고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민정아. 할머니한테 나는 12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더. 그런데 내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고. 그러니 내가 당연히 그 난리를 부릴 수 밖에 없는 것 아니야?


"나도 가끔 그러잖아. 이건 뭐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려니 앞이 캄캄할 때는 누가 전화를 걸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더구나 생각을 해봐. 할머니는 김치통을 엎질렀다고. 그게 말이 그렇지 어디 쉬운 일이니? 식탁이며 바닥이며 냉장고며 어디 김치국물 안 튄데가 있을라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리고 야야. 너 때문에 오히려 119 대원들이 힘들었어. 그 김치를 치워주고 가셨다는 거 아니야.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이처럼 앉아서 엉엉 우는 할머니를 보고 대원들은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바닥에 떨어진 김치를 주워서 주방에 나와있는 그릇에 대충 주워담고 바닥을 걸레질 하고 할머니 옷도 갈아 입혀 드렸단다.


듣고 보니 그건 무척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민수도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일부러 소방서까지 들러서 빵과 커피를 사다드리고 오지 않았느냐 말이다. 물론 생색을 내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민수 말은 할머니의 어이없는 전화 거절로 일이 커졌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뿐이었다.


그렇다면 밝은 미소를 띠며 소파에 앉아 다른 할머니들의 위로를 듣고 있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민수는 냅다 민정이 마치 자신의 할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따져 묻기 시작했다.


"그 할머니들이 모두 노인정 할머니들이야?"


응? 그건 물어보지 않았다. 그 할머니들이 노인정 할머니들인가?


"넌 애가 왜 그러니? 너네 할머니를 알아도 너가 더 잘 알텐데. 할머니 친구 무척 많으시잖아. 달리 마당발이신가. 내가 전에 뵜을때만 해도 아파트 대문 나서기 무섭게 여기 저기 손 흔들면서 인사하고 다니시두만. 나는 무슨 대통령 선거라도 나가신 줄 알았잖아. "


듣고 보니 그렇다. 할머니는 애들로 치자면 동네 골목 대장이다. 항상 우아한 미소를 띠며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온 동네 소문은 다 듣고 다니시는 분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왜 모를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자랑처럼 말씀하실 때마다 민수는 온 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래서 회사 지각했다고 너네 과장한테 닦이지는 않았어? 나는 할머니보다 너네 과장이 더 골치 아플 것 같은데. "


골치 아픈 과장은 오늘 결근이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날이 있는가 하면 앞으로 넘어져도 무릎 하나도 까지지 않는 날이 있기 마련이라더니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민수야. 너가 화가 난 이유가 뭐야? 할머니가 안 다쳐서? 할머니가 전화를 안 받아서? 할머니 옆에 다른 할머니 친구들이 둘러앉아서? "


할머니에게 연락이 되는 피붙이는 민수 뿐이다. 그런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민수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다. 할머니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당장 뛰어갈 수 있는 사람도 민수 하나 밖에 없으니 늘 긴장이 된다는 말을 민정아. 내가 도대체 몇 번이나 말을 해야 너는 알아듣는 거니?


"그런데 민수야. 할머니는 안 다치셨고. 할머니는 노인정 말고도 친구들이 많으시고. 노인정 할머니들과 싸움을 해서 그냥 너한테 넋두리 하신건 아직 기운이 남아 있으시다는 거고. 냉장고 문을 열다 김치통을 떨어뜨려서 박살은 났지만 혼자서 밥 해 드시는 건 문제 없다는 뜻이고. 도대체 왜 화가 난거야? 오늘 지각해서? 아침부터 너무 놀라서? 물론 놀라기는 했겠지. 갑자기 연락이 안되시니가. 그런데 너무 너무 예민한 것 같아."


내가 예민하다고? 민수는 갑자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오늘 같은 일을 민정이 네가 당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대뜸 소리부터 지르고 씩씩댔다.


"근데 할머니가 그러라고 한 건 아니잖아. "


그러라고 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섭섭하다고 전화를 하고 울고 화를 내고 징징댈 것이 뻔하지 않은가.


"정말 그러셨어? 네가 연락 안하면 울고 화내고 너한테 짜증내고 그러셨어?"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할머니의 전화를 민수가 받지 않더라도 할머니는 재차 전화를 하는 일은 없었다.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민수가 가겠다면 큰 소리로 웃으시며 요양사와 다녀오면 된다고 하셨다.


"것봐.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일이고 너가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잖아. 너는 스스로를 너무 못살게 굴어. 왜 모두 네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냥 이야기하는 거야. 꼭 도움을 바라고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야. 너가 그럴때마다 앞으로 너한테는 무슨 이야기든 하기 전에 좀 더 고민해야 하는건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 그리고 걱정마. 내일 재판은 나혼자 다녀와도 돼. 오늘도 힘들었을텐데 괜히 마음쓰게 하고 싶지는 않아."


갑자기? 민정 너 왜 그러는거야? 너 혼자 거길 어떻게 가겠다는거야? 재판이 누구 집 애 이름이야?


"아니. 누구 집 애 이름은 아니지만 일단 혼자 다녀올게. 걱정마. 걱정말라는데도 너는 왜 난리니?"


처음부터 혼자 다녀오겠다는 말을 안한건 아니었지만. 정말 혼자 다녀오겠다는 말에 왜 이렇게 섭섭하고 화가 나는 거지?


(내일 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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