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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만은 지기 싫다

할머니 제발

by 리뷰몽땅

"내가 어떻게 참아. 어떻게. 그것들이 나한테 어떻게 이래. 어떻게. 내가 이렇게 살아야 겠어? 이렇게는 못살아. 못살아. 너무 분하고 원통해."


출근 준비에 한창 바쁜 민수에게 할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 며칠 조용하다 했다. 그렇다고 출근시간에 맞춰 이렇게 전화까지 하시는 건 좀 너무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바빠요. 라고 말할만큼 인정머리가 없지는 않다. 스피커 폰을 켜두고 민수는 바쁘게 방 안을 왔다갔다 하며 할머니를 다독였다


"그러니까, 할머니. 이제 노인정 그만 가시라고 했잖아요."


"내가 왜! 내가 왜에에! 그것들은 노인정에 죽치고 앉아서 나라에서 주는 돈 다 받아처먹고 있는데 내가 왜!! 그 노인정이 어떤 노인정인데. 그거 터줏대감이 누군데. 지들이 오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내가 총무였고. 그런데 내가 왜!"


아흔이 다 된 노인이 목청은 여전하다. 잠깐 멀찌감치서 감탄 한 번 하고 민수는 다시 전화기로 다가간다.


"가면 괜히 속만 상하시니까..."


할머니가 사시는 아파트는 20년이 됐다. 노인정은 19년이 됐다. 처음에는 노인들이 모여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낸다며 노인정의 문 앞에도 안가셨던 할머니는 어쩌다 노인정에서 자리를 하나 차지하셨다. 노인정 살림살이를 맡아 하시면서 스스로를 인텔리라고 부르셨다. 그러다 또 개인적인 사정으로 노인정을 잠시 떠났다가 돌아왔더니 할머니의 자리가 없어진 것이었다. 노인정에서 뒷방 늙은이가 되어버린 할머니는 참을수가 없었다. 감놔라 배놔라 훈수를 한마디씩 두셨다. 처음 한 두번은 들어줄법도 하지만 매번 계속되면 이런 시어머니가 없었겠지. 민수는 노인정의 다른 할머니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우리 할머니가 어떤 할머니인가. 세상 사람들 다 잘못을 할 수 있어도 자신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어른이 아닌가.


"누구는 밥하고 상 차리고 누구는 가만히 앉아서 얻어 먹기만 하는게 그럼 맞는 말입니까?"


싸움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무릎은 아프고 걷기는 힘든데 그러다보니 몸무게는 자꾸만 늘어가던 할머니는 집에서도 움직이는 것이 쉽지는 않다. 노인정에서야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테다. 할머니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지만 노인정 할머니들도 대부분 70,80 노인네들이 아닌가. 가만히 앉아서 차려주는 밥상 받아먹는 할머니가 곱게 보이지는 않았겠지.


할머니의 한탄을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려는데 전화기 너머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쾅 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멀찌감치에서 출근 준비를 하던 민수가 전화기로 달려간다.


"할머니,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이고, 내 죽는다 ,내 죽어"


출근이고 뭐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민수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일단 119를 불러야겠다. 그리고 직장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조바심을 내며 종종 거린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보면 사실 별다른 큰 일이 있지도 않지만. 그래도 사람일이라는게 모르지 않는가.


"119 신고하신 분이죠?"

"네. 할머니가 쓰러지신 것 같아서요."

"저희가 여기 와 있는데요. 쓰러지신 게 아니라 찌게가 담긴 냄비를 꺼내다가 떨어뜨리셨대요."

"네? 그럼 화상이라도 입으신건가요?"

"아니요. 냉장고에서 꺼내시다가. 그래서 바닥이 온통 엎어진 찌개 투성이네요."


다리에 힘이 풀리고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이 아래로 툭 떨어져도 민수는 꼼짝 않고 서 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가. 아들 며느리 먼저 보내고 왜 손주 하나 붙들고 이러시는가. 그렇다고 혼자 남으신 어른을 모른체 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한 두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매번 왜 이러시는가. 불현듯 민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평소라면 그대로 돌아섰을테지만 이번만은 지기 싫다. 아무리 할머니라지만 이번만은 질 수가 없다. 다시는 이런 일 못하시게 만들 요량으로 민수는 씩씩대며 할머니 집 계단을 올라갔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서니 동네 할머니들은 죄다 그 집에 모여있는 것처럼 웅성댄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갑자기 또 숨이 멈칫하는데 하이톤의 할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고, 우리 손자가 할머니 걱정돼서 왔구나. 이것보라니까. 우리 손자가 이렇게 효자라니가. 어서 들어와. 할머니는 괜찮다."


"안녕하세요. 제가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안 사가지고 와서 잠깐 마트에라도 다녀올까요, 할머니?"


저 동네 할머니들의 정체는 뭐지? 노인정에서 한바탕 싸우고 왔다는데 저 할머니들은 뭐냔 말이다.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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