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느새, 우리는 이별하고 있었다

이별은 말로 하는 게 아니더라

by 리뷰몽땅


우리는 이별을 연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왔다

그것이 이별의 진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지우고 있었다


-이별노래 정호승-




퇴근할 무렵이면 민수는 멍하니 책상에 앉아

주머니에 손을 꽂고 구두를 신은 두 발을

서로 맞부딪히면서 마음 속으로

백 번을 세었다. 한 번, 두 번...백 번

백 번이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 퇴근을 했다

가끔은 자신도 모르게

민정의 집 앞에 서있기도 했다

불 꺼진 민정의 방이 눈에 들어오면 걱정이 됐다

이 늦은 시간까지 어디서 뭘하는거지?

그럴때면 핸드폰을 꺼내어 한참 망설였다

그러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허겁지겁 다시

골목안으로 들어갔다. 민정의 축 처진 뒷모습을

보고 반지하 방에 불이 켜지면 다시 한숨을 쉬고

터벅 터벅 걸었다. 제기랄 이게 뭐하는 짓이지.


늦은 밤 경사진 길을 올라가며 민정은 자신의

집 앞에 서성이는 남자를 보았다. 처음엔

얼어붙은 듯 무서웠지만 그 익숙한 실루엣이

다름아닌 민수라는 것을 알아채는데는 그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천천히 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민수의 초조한 뒷모습을 보았다

목구멍에서는 민수야 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점점 가까워지면 민정은 발소리를 크게 냈다

쾅 쾅. 또는 헛기침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민수는 화들짝 놀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 옆 골목으로 숨어 들었다.

바보 멍청이 여전하네

처음에는 그런 민수에게 화가 났다.

저럴거면 왜 집 앞에까지 와서

지지리 궁상을 떠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랬다. 그들은 그렇게 말없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민정은 매일 아침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웠다.

민수는 매일 아침 평소에는 먹지도 않던

라면을 끓여 국물까지 호호 불어가며 마셨다.


민수는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이 잦아졌다.

민정은 늦은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유튜브로 영화 요약편을 봤다


민정은 한 달에 한 번 버스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하나 들고서.

민수는 차를 타고 주말마다 어디론가 달렸다.

가끔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는 날도 있었다.


시간은 흘렀다. 만약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린다면 민수와 민정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둘은 다시 만나 토닥토닥 다투고 다시

사랑하고 다시 싸우고 다시 화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다. 말없이 이별이 시작됐다.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되려면 민정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고 능력있는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길에 민수를 우연히 만나야 한다.

그리고 가벼운 웃음을 띠고 무척이나 반가운 듯이

민수의 손을 잡고 잘 지내느냐고 물어야 한다.

그러면 잘 차려입은 민수는 그런 민정을 보고

약간은 안도한 듯이 큰 소리로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해야 한다. 물론 민수의 옆에는

아주 예쁘고 귀여운 한 여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 여인이 걸어가고 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명쾌하다. 명품 가방을 들지는 못했지만

꽤나 근사한 가방을 든 그녀는 무심하게

골목을 걸어간다. 그리고 반지하 방 앞에 서서

잠시 두리번거린 후 다시 뒤를 돌아선다.


없구나. 이제는.



sticker sticker

내 맘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다를 지금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연재를 끝냈습니다. 고민이 많았어요.

이 두 남녀를 영원히 사랑하게 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쓰면 쓸수록 저는 이들이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민수도 민정도

서로에게 이별을 고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완성의 글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들의 결론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여전히 망설이고 있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합니다.

그러다가 이들에게 각자의 길을 주고 싶었습니다. 너무 오랜 기간동안

그들은 막연하게 서로에게 기대어 있었고 일종의 의무감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쩌면 이들은 다시 재회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keyword
이전 12화두려워하는 일은 꼭 생기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