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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선 Nov 22. 2020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붙들려 찾게 되는 책.

붙들려지는 책이 있다.

한 번을 읽고 두 번을 읽고,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도록, 붙들려 찾게 되는 책.


한강의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받은 기침이 나는 겨울 자정 무렵.

죽은 이가 찾아와 한 발을 막 방에 들였고, 한 발은 들여놓지 못한 채 엉거주춤 걸쳐놓았다.

k와 죽은이 임선배의, 눈과 눈이 마주친다.

어쩐 일이세요 묻고는

여기 앉으실래요 두 손으로 권한다.


뭐든 이유가 있겠지, 죽은 지 삼 년이 지난 뒤 누군가에게 올 때에는. 기다려보기로 했다.(p11)


k에게 죽은 이 임선배가 찾아온다.

찾아왔다라는 말은 어쩌면 맞지 않는지 모른다. 그의 말로는 가고 싶은 곳을 가지도,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니라 했으니까.

k도 왜 죽은 임선배가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차라리 경주 언니가 오면 올 일이지. 보고 싶은 사람.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까다롭고 유난하고 피곤한 선택들로, 그러나 자신으로선 다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던 유일한 선택들로 이루어진 것이 그녀의 삶이었는지도 모른다.(p41)


그런 삶을 살던 경주 언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갓길에서 사고가 난 차를, 도움이 필요한 이를 도우러 나갔다 사고를 당해 죽는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시간에 갇혀 앞을 보지 못하므로(p40)



시간에 갇혀 앞을 보지 못하더라도

시간에 갇혀 앞일을 알지 못하더라도

경주 언니와 임선배는, 그렇다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살 순 없었다. 불의를 구별할 줄 알아 싸웠으며, 약자를 위해 농성을 하는 동안 자신의 궁핍함은 돌보지 못했고, 무엇보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부끄러운 인간임을 자각할 수 있는 예민하고 소소해 보이나, 고결한 이들이었다.

비록,

시간에 갇혀 앞을 보지 못하더라도

시간에 갇혀 앞일을 알지 못하더라도.


드러내 놓고 불의를 일삼으며 부끄러운 짓을 하는 이들과, 그걸 알면서도 자기 자신의 평화가 깨질까 두려워 관망하는 자들은, 경주 언니와 임선배 같은 이들이 편치 않다.

사실 누구보다 평화를 위해 애를 쓰는 이들이, 고통의 바깥에 서 있는 자들에게는 두려운 존재들일 테니.


그리고 이제 k만 남았다. k는 남아 글을 쓴다.

임선배가 왔을 때, k는 삼국유사를 토대로 한 희곡 대본을 쓰던 중이었다.


함께 있어주세요, 소녀가 말한다. 젊은 승려가 멀찍이 떨어져 서서 대답한다. 그건 안 된단다.
제발.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만.
소녀는 나무 욕조의 물속에 들어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머리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다. 그 눈송이들을 커다랗게 확대한, 눈의 결정 모양을 한 빛무늬가 무대 뒤편 검은 벽에 하얗게 비쳐 있다. 그 결정들을 홀린 듯 바라보며 승려가 묻는다. 왜 머리 위 눈이 녹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p41)


나는 잠을 잘 수 없어요. 당신은 잠들 수 있어요? 잠깐 잠들어도 꿈을 꿔요. 당신은 꿈을 꾸지 않아요?
언제나 같은 꿈이에요. 잃어버린 사람들.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거기서 멈췄다. 더 쓸 수 없었다.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생생했기 때문이다. (p45)


삼국유사의 전개대로라면, 소녀는 관음보살이었고, 승려는 소녀가 목욕한 물에 몸을 씻어 부처가 되어야 하지만, k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소녀가 관음보살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꿈을 꾸는 소녀는 사람들의 고통을 모른 척 한 채, 스스로 고결한 듯 관음보살이 될 수 없었다. 목욕을 한 후, 밖으로 걸어 나오지만 여전히 소녀인 채.

관절을 꺾고 몸을 비틀고, 무너지고 으스러지는 모습만 남았다.(p45)


경주 언니가 가고, 임선배가 가고 k만 남았다. 고통의 바깥에 서서.


바깥에 있는 동안 우리는 평화로울 수 있을까. k처럼 바깥에 있다는 것이 무섭도록 생생함을 알아차리고 살 수나 있을까. 아니면, 시간에 갇혀 있다는 핑계를 대며 벌레처럼 서로 찌르고 찔리며, 꿈틀대고 꿈틀대면서도 이것이 평화인 줄 알고 살까. 마비와 같은 삶.


아니요, 불가능해요. 이 세상에서 평화로워진다는 건.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 죽고.
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뒤척이고 악몽을 꾸고. 내가 입을 다물었는데 누가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이를 악물고 억울하다고, 억울하다고 하고.
간절하다고, 간절하다고 말하고.
누군가가 어두운 도로에 던져져 피흘리고.
누군가가 넋이 되어서 소리 없이 문을 밀고 들어오고.
누군가이 몸이 무너지고, 말이 으스러지고. 비탄의 얼굴이 뭉개어지고.(p46.p47)


하지만 평화는 부끄러운 게 아니야.(p47)


일이 끝난 후 집까지 한 시간 반이 되는 거리를 종종 걷는다는 k를 보고 임선배가 물은 적이 있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 고등학생같이 방황할 거냐고. 그의 말을 듣고 걷는 k에게 더 이상 그 시간은 평소처럼 자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방황을 끝내니 눈이 밝아지고 고통밖에 서 있던 k에게 고통 속 이들의 모습이 보였던 것일까. 나는 왜 이곳에 있나 주위를 보며 길을 잃었나. 자책하고 자책하며.

차례로 마주쳤던 경주 선배와 임선배의 죽음에, 영영 잃어버린 그들의 꿈을 꾸며, k는 관음보살이 되지 않으려는 소녀처럼 더 이상 평화를 누리는 것에 대한 불가능을 알아버리곤 맘이 으스러지고 몸이 비틀어져 버린 걸까.

그런 k에게 평화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말하는 임선배의 말은 비난도 아니고, 경멸도 아닌 위로이며 격려이다.




고통밖에 서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우리를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고통과 고통 밖을 구분 지을 수 있나. 누가 누구에게 너는 지금 고통밖에 서 있다 비난하겠는가. 우리의 삶은 이토록 춥고 쓰린데.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는 이를 다시는 볼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는데.


그러니 어떻게... 어떻게...

우린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안쓰러워하지 않을 수 있나.

볼 수 없는 이가 꿈에 나와, 꿈에서라도 보고 좋다 하던 그를.

힘들 텐데. 애써 잡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걸어 나가는 그가 보일 때.

내 앞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누군가 울 때.

내가 어떻게 당신들의 평화를 바라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시간에 갇혀 앞은 보지 못하더라도 내 앞에 있는 당신은 보이는데.




이제 밝아지려는가, 나는 생각했다. 그는 아직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지 않은 채, 마치 검푸른 허공에 멈춰 서려는 듯 느리게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우리의 눈과 눈이 만났다.
평화를. (p52)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눈 한 송이가 녹는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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