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9년 지리산 둘레길을 시작으로 제주 올레길, 부산 갈매길, 강원도 바우길, 남해 바래길, 남한산성길, 한양도성길, 서울 둘레길, 순천 둘레길, 밀양 둘레길, 강릉 둘레길까지, 문득 내가 살아있는지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배낭을 들쳐매고 마냥 걸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산길, 깊은 시름 날려주는 바다길, 동네 멍멍이들 모두 짖어대는 마을길, 그림자도 찾기 힘든 인적 드문 동네길, 차들이 스쳐지나가는 위험천만 도로길.. 둘레길 코스마다 발 아래 다양한 길들이 펼쳐지고, 새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 다양한 자연의 ASMR이 돌비 서라운드로 들린다.
마음이 한참 힘들었을 때 찾은 지리산 둘레길, 어쩌다 첫 스타트를 끊은 것이 올해로 15년째가 되어 온다. 힘든 마음을 안고 무거운 걸음을 시작했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머리속도 한결 맑아지는 경험을 해서인지 요즘도 마음이 힘들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터벅터벅 길을 걷고 있는 내 모습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자국에 마음 속 응어리들도 같이 깊게 새기고, 산들 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 속 잡생각들을 날려본다.
그동안 짧은 코스들을 주로 다녔는데, 이번에는 기나긴 여정이 될 것 같다. 서해랑길 103코스, 남파랑길 90코스, 해파랑길 50코스, DMZ 35개 코스 총 4,500Km 코리아 둘레길 완주를 목표로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나긴 여정을 기록을 남겨보려 한다.
언제 어디로 갈지 나도 모른다.
때로는 1박 2일의 여정으로, 때로는 3박 4일의 여정으로, 때로는 그보다 긴 여정이 될 수도 있겠지. 15년 전 40리터 배낭을 메고 미끄러운 스니커즈 신고도 어찌 지리산길을 그리 잘 오르내렸나 싶다. 이제는 40리터 배낭이 지나온 인생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하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어깨를 짇누르기도 하고, 두툼한 등산 양말에 값나가는 트레킹화까지 신었는데도 발바닥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체력이 예전같지 않음을 느끼지만 한 코스씩 한 코스씩 걷다 보면 언젠가는 다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그런 말을 하더라. 길은 걷다가 뒤돌아 보면 생겨있는 거라고.
인생의 희노애락이 이정표가 되고, 인생의 여정이 둘레길 코스가 된다.
앞만 보고 너무 열심히 가지 말고 가끔은 뒤돌아 보는 여유를 가져야지. 잠시 숨돌리며 주변의 풍광을 즐겨야지. 그리고, 또 다시 길을 걸어가는 거야.
2024년 11월 20일, 기록을 시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