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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Jun 03. 2019

모성의 발톱

자식을 변호하는 부모의 속내에 대해


학생 때 단편 영화 제작에 참여한 바도 있고, 한때 영화판에 발을 들이려 기웃거리기도 한 적이 있어서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식에 관심이 많이 간다. 작품의 리얼리티나 시네마토그라피를 위한 장치라 우겨대면서 불필요한 성애 노출과 폭력성을 동원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걸 합리화하는 영화를 극혐하는데, 봉준호 감독은 그런 면에서 실망 시킨 적이 없다. 


실은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 앞서 공유했던 기사도 그렇고, 이래저래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대해 곱씹어 보다가 영화 <마더>에서 표현된 모성의 이중성이라는 지점에서 상념이 맴돌게 되어 같은 맥락의 선상에 놓인 소설이 생각났다. 한때 동네 미국인 친구들과 함께 하던 북클럽에서 다뤘던 소설.


영어 원제는 < Defending Jacob> 이고,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제이컵을 위하여>로 붙어 있다. 장르 소설답게 페이지가 잘 넘어가면서도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중력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영화 <마더>와 마찬가지로, 살인 사건과 관련된 자식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부모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근교의 한 공원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는 인근 중학교 학생. 살해된 학생과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둔 검사 앤디는 관할 구역에서 벌어진 이 사건 관련 조사를 응당 자신이 맡게 될 거라고 여기는데 예상 외로 사건 팀에 들어가지 못한다. 자신의 아들 역시 용의자 선상에 오를 수 있다는 어이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고작 중학생인 내 아들이 동급생을 잔혹하게 살해한 범인일 수 있다니. 그걸 받아들일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아들은 결국 용의자로 지목이 되고, 앤디와 아내는 소중한 외아들이 ‘누명’에서 벗어나도록 변호사를 고용하고 법정 소송에 뛰어들게 된다. 소설은 미국이라는 사회의 법 구조, 제 자식이 범인일 리 없다고 철썩 같이 믿다가 미궁에 빠지게 되는 부모의 심리,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 속에서 부모가 선택할 법한 입장 등을 핍진성있게 그려내며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자식이 어쩌면 범죄자일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였을 때, 당신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정답은 뻔한 것이다 사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끝까지 변호해 누명을 벗게 해야 하는 것이고, 죄를 지었으면 법에 따라 죄값을 치르게 하는 것. 그러나 이런 식의 ‘쌀로 밥 짓는’(이건 대화의 희열이란 방송에서 배철수 씨가 한 표현이다) 뻔한 결론으로 도출될 주제라면 애당초 논쟁 거리가 되지 않는다. 작가의 메세지가 그렇게 단면적인 것이어서야 무슨 매력으로 독자를 집중시키겠는가. 헌데 북클럽 모임에서 각자의 의견을 나누던 와중 유달리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감 있게 입찬 소리를 내놓는 두 사람이 있었다.


“당연한 거 아냐? 아무리 내 자식이라도 죄를 지었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지. 난 한 치의 여지도 없이 이렇게 말할 거야. 네 죄에 대한 책임은 네가 져야 하는 거란다 얘야, 가서 형을 살고 나오렴, 하고.”


내가 그 북클럽에 흥미를 잃은 건 바로 그날의 토론이 시작이었다. 너무도 당당하게 ‘쌀로 밥 짓는’ 이야기를 내놓는 그 두 사람이야말로 제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리 판단에 눈감아 버릴 전형성을 가진 유형들이었기 때문에 발언의 희극성은 더 두드러졌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고 사유하려는 시도는 제거하고 급속히 내리는 결론에 어이가 없어 북클럽을 지속할 의욕이 사그라든 것이다.


모성의 본질이란 숭고하다기보다는 동물적이고, 원색적이고, 그야말로 본능에 충실한 그악스러운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내 어머니 여덟 남매를 낳아 어려운 형편에도…’ 어쩌고 하는 희생적 모성 찬양에는 솔직히 공감보다 조소가 나온다. 그건 자식인 당사자로서야 고맙지만 밖에다 대고 자랑할 일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 새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이 원초적 모성은 위대하기도 하나 때로는 비정한 얼굴로 돌변할 비린내 나는 본능이다. 왜냐하면, 새끼를 지키기 위한 모성의 맹목성은 상황에 따라 맹수의 발톱이 되어 누군가를 할퀴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영화 <마더>, 소설 <제이컵을 위하여> 두 작품 모두 바로 그 지점에 좌표를 찍어 놓고 있다. ‘당신의 모성은 타인에게 안전한 것입니까’ 라는 질문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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