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약초콜릿 Jan 13. 2020

5. 어떻게 여행이 싫을 수 있어?

 

  여행이 취미인 시대이다.


심지어 여행이 특기가 되어서 경험과 관련 지식 전달을 주업으로 삼는 이들도 생겨났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세상 곳곳이 제 발로 걸어오는 격이다. 스마트폰을 열어 검색하면 여행지의 명물과 감칠맛나는 설명 들, 예외 없이 따사롭고 평화로워 보이는 전경을 담은 사진들을 내려 볼 수 있다. 때론 감탄하고 한편으론 여행객이 부럽다.


 나는 여행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어디론가 떠날 계획을 잡으면 대략 일주일 전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해서 전날 밤은 꼬박 지새우기 일쑤다. 컨디션이 최악으로 떨어지면 여행 떠나는 날이다.


그래서 학창 시절 소풍날이면 어김없이 속이 불편해 김밥도시락을 먹고 심하게 체하거나 수면부족이 불러온 집중력 저하로 곧잘 넘어져 다치곤 했다. 친구들은 신이 나서 뛰노는 소풍지에서 난 병색 짙은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때는 그리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려서는 허약한 몸을 핑계 삼기 수월했지만 문제는 성인이 된 후였다. 이젠 다 큰 어른인데도 여행이라고 하면 여전히 똑같은 사전 반응 때문에 종종 주변인들에게서 빈축을 산다.


 “여행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레고 들뜨지 않아?”


 “나이 들면 정말 기운 딸려서 여행도 못 다녀. 지금을 즐겨!”


 “아니 어떻게 여행을 싫어할 수가 있어? 여행이야말로 에너지 보충제인데.”


 “너무 예민하고 까다롭게 굴면 모두가 불편해져.”


 안다. 나도 이론과 이미지로는 여행이 얼마나 근사하고 새로운 경험이 될지 충분히 안다.

하지만 실행을 앞두면 늪에 빠진 기분이다. 새로울 것들에 흥분되는 반면, 그것들 때문에 겪을 괴로움도 피할 수 없으니까.


어찌 된 게 물만 달라져도 배앓이로 고생하고 잠자리가 바뀌면 가위에 눌리기 십상인 내 육체가 여행에 가장 큰 훼방꾼이다.


 어쩌면 일화 속 그 인물도 나와 비슷했을까?


 하루는 소크라테스의 한 제자가 자신의 친구가 여행을 다녀왔는데 재미나 흥을 느끼지 못했더라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제자의 친구를 두고 말했다.


 ‘그 친구는 여행 내내 자기 자신을 데리고 다닌 게로 군.’


부산 어린이대공원


 여행은 실생활에 속박된 자신을 놓아주는 최면제가 되기 좋지만 최면이 제대로 안 먹히는 육체도 있는 법이다.   


 문득 아주 오래전에 읽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느 소설 한 대목이 떠오른다. 등장인물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아버지는 평생 고향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피치 못할 연유로 발이 묶인 것도 아니었고 순전히 본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세상 밖이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여행을 떠나라고 주위에서 권했지만 한사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우연이든 목적이든 그 마을로 여행 온 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인심 좋게 대접하고는 그들의 여행담이나 사는 곳의 문화와 양식을 듣길 원했다. 그것이 여행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걸어오는데 굳이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다’면서.


 이 아버지를 한심하다거나 소극적 성향이라고 치부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진리마냥 실행에 옮기고 실천하는 삶이 옳은 방향이라고 대다수가 믿으니 말이다.


그런데 두근거리는 삶이 반드시 액션에서 오는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체력이 허락하지 않는데도 여행은 신선한 체험이라며 무조건 등 떠미는 게 조언인지?


 오해할까 싶어 밝히지만 나도 새로운 자극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을 아주 즐긴다.

다만 그것이 장거리 여행이 아닐 뿐이다.

가깝게는 내가 사는 동네 지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고, 비록 널리 알려지진 않았어도 동네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은 솜씨 좋은 식당들도 여럿 안다.


또한 좀 더 거리를 넓혀 시가지 내 후미진 동네 탐방도 좋아하는 활동이다.

그곳을 지나는 대중교통 노선을 꿰다 보면 몰랐던 지역을 발견하는 재미가 소소할 뿐 아니라 내가 사는 지역의 범위와 경계가 결코 좁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이런 점에서 비추어보면 나는 내가 여행을 꺼려하거나 즐기지 못하는 축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숲을 보길 원하는 사람이 있듯, 나무와 풀을 가까이서 보길 원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숲을 보러 온 이들에게 안전한 길잡이는 나무와 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소설 속 그 아버지에게서 환대를 받은 여행객들은 아마도 그 고장의 풍물이나 절대로 여행안내 책자에는 수록되지 않을 귀한 정보들을 얻었을 수 있다.

어쩜 이런 교환이 누군가에는 가장 효율적인 여행 방식일 테고, 이것은 자율 선택이라기보다는 기질 차이나 환경, 여건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 아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목적은 어디 어디 동네를 가려고 하는데 맛집이나 볼거리가 있냐는 것이었고, 나는 내가 아는 한 정성껏 답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4. 쇼핑의 손짓을 거부하기 어려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