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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약초콜릿 Sep 12. 2021

12. 운명적 사랑

'적'은 일본의 영향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표현이라고 한다.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미 보편화된 낱말의 접미사이므로 과도하고 어색한 표헌만 아니라면 충분히 그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지장은 없다.


보통 ~적은 범위나 뜻이 명확하기보다 쓰이는 단어의 상태나 성격을 띠는 정도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또한 확신할 순 없는 감정이나 현상을 드러내 보일 때 단어 뒤에 '적'을 붙인다.

심적, 심리적, 보편적, 실용적 등이 이렇다.


'적'은 인간이 사회에 가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대다수  남들은 은유나 약간은 회피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모습이 겸손과 교양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최근의 '돌직구'라는 단어는 직설을 넘어서 듣는 이를 당혹게 하고 나아가서는 상처까지도 입힐 수 있는 발화 태도를 가리킨다.

시대가 바뀌면서 점점 말하는 습관까지도 예전과 차별을 두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진보된 문화를 형성하고 개인의 발전을 표상한다고 믿어버리는 격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간의 유전자는 초기 인류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유전자의 동질성은 생물학 측면뿐 아니라 사고체계와 세상에 이해도 그대로라는 말이 된다. 여전히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다지고 대화를 나누면서 약간은 조심스럽게 대상의 기분을 파악해 그에 적합한 호응을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상호존중이고 이득이 되어 돌아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은 이런 노력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랑을 말할 때에도 심심치 않게 ~적을 사용한다.

운명적 사랑, 갈망적 사랑, 비극적 사랑, 낭만적 사랑 등이 그것이다.

주위에서 ‘내 사랑은 운명이야, 갈망이야, 비극이야, 낭만이야.'라고 정의하는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유도 사랑은 ~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인 사랑이 사랑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고 왠지 사랑은 암시가 필요한 것 같아서다.

어쩌면 이점은 아직 사람이 사랑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 어려워서일 수 있다. 사랑에 대한 감정과 정의가 개인마다 다른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한편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몰라도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 마음은 비슷하다.

누구나 사랑은 기쁨과 낭만 풍요를 선사해주고 운명으로 엮여 결정된 것이길 바란다.

누구나 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가를 수 없는 절대적 힘이 작용하길 기대한다.

다른 이들은 전혀 느껴보거나 알지 못하는 비밀과 환상을 공유한 관계여서 언제 어디서건 서로를 잊을 수 없고 결국 이어지는 수레바퀴와 같은 운명이 자신의 사랑을 지배한다고 믿고 싶어 한다.


환상과 쾌락만으로는 사랑을 지탱하기가 버거워서 사랑의 굴레로 운명을 끌어다 놓는 것이다.

운명이 결정하고 명령한 사랑은 지켜내기가 훨씬 수월할 테니 말이다.

혹은 가까운 곳에서 실제 운명인 사랑을 지켜보면서 저절로 사랑의 참모습을 꿈꾸게 된 것일 수 있다. 간혹 운명인 사랑은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도 해서 그 존재의 신빙성을 높였다.


그러나 운명인 사랑은 희소하고 그 무게가 육중해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더구나 세상에 자신의 사랑을 설명할 때 운명을 거론하기에는 어딘지 낯부끄럽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이럴 때 겸손하며 충만한 표현이 '운명' 사랑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거나 과함이 없는 '운명'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를 만족시킨다.


 만약 누군가 당차게 자신의 사랑은 고결한 운명이라 외친다면 대다수가 그 당사자를 속으로 비웃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운명이 이끄는 사랑은 왠지 현실이 아닌 영나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아서이다.


운명적 사랑을 속삭이는 영화는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넘치고 넘친다.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사랑은 인류의 최대 관심사임이 분명하다.

아름답고 가슴을 적시는 스토리와 남녀 주인공의 실제를 능가하는 감정 연출은 완성도가 뛰어난 영화는 수두룩하다. 여기선 그중에서 다른 측면으로 다가가 보고 싶은 두 편을 이야기해보자.

이와이 슌지 감독 영화 러브레터는 언뜻 보면 안타깝게 떠나보낸 사랑을 잊지 못하는 히로코의 여전한 애정을 그리는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영화는 히로코

애인의 첫사랑 이츠키의 풋풋한 첫사랑을 전개한다.

동명인 두 남녀 이츠키는 학창 시절 서로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며 정체 모르는 감정에 사로잡히지만 그것이 사랑인지는 모른다.


자신의 첫사랑과 비슷한 히로코와 새로운 사랑에 빠진 (남자) 이츠키는 히로코를 발견하고 과연 운명이라고 믿었을까?

그렇다면 히로코 입장도 마찬가지였을까?

뒤늦게 이츠키의 마음을 확인한 (여자) 이즈키는 지나간 첫사랑이 운명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우인태 감독 영화 야반가성의 송단평을 짚어보면 그는 열렬히 사랑한 여인 두운언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그러나 악의를 품고 조작된 사고로 몸이 만신창이가 되자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두운언의 곁에서 사라져 그녀의 가슴을 찢어놓는다.

송단평이 없는 두운의 여행은 모든 빛과 색을 잃은 무덤 같은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두언은 송단평과의 사랑이 운명이 요구한 사랑이라고 믿었음이 확실하다.

그와의 약속을 어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언제까지나 기다렸다.

영화에서 그리는 운명적 사랑은 비극으로 흐르는 경향이 짙다. 극적 전개와 서사를 본질로 삼는 극본도 운명이라고 믿는 사랑의 엇갈림에 대해 말하는데 현실은 오죽하겠는가.


어쩌면 사랑은 숱한 기대와 실망을 끝낸 후 마침내 찾아낸 휴식과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운명적 순간이나 분위기를 느끼고 성취하는 것만이 위대한 사랑으로 가는 길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일상 속에서 사소한 정감의 축적에서 키워낸 사랑을 운명적이지 않다는 시시껄렁한 눈가림에 속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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