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약초콜릿 Sep 20. 2021

13. 용서, 나를 위해 마지못해 끌어안다.

어린 시절 용서란 사과하면 주고받을 수 있는 일인 줄 안다. 친구사이에 사소한 오해나 시비가 붙어도 미안하단 말 한마디면 쿨하게 넘어간다. 부모님께 야단을 맞을 때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한다. 그러면 대부분 부모님은 옳고 그른 행동에 대해 재차 훈육하고는 이내 인자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무릇 어린 날의 용서란 교감의 일종인 셈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용서는 다분히 일방이며 불균형이다. 용서를 바라는 자와 주려는 자 사이의 간극을 좁힐 방도는 오로지 용서하려는 자의 결심만이 유일하다. 그래서 사과는 일회성에 그치고 마는 성질의 것이 못된다. 어떤 면에서는 끈질긴 구애와 비슷하다.


자신의 인생에 오점을 남기거나 더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지우는 누군가의 실수나 고의로 인해 앞날을 지켜보는 게 고통스럽다면 용서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때에는 절망감에 빠져 끝을 모르는 비애와 낙심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는 중이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피할 방법은 없었는지 답이 없는 질문에 스스로를 내몬다. 시작은 오욕을 남긴 상대에 대한 비난과 원망이지만 종국엔 스스로를 비웃고 나무란다. 자신이 못나고 변변치 못해서 이런 화를 입은 거라고 일정 부분은 사실일 수 있다. 상대에게 만만하고 우습게 보여 헌신짝 취급을 받았을 수 있다. 그러나 설사 이렇다 해도 당신이 상처 입고 아파해도 무방한 건 절대 아니다. 당신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건 못나고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해자의 잔인한 습성에 우연찮게 노출되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보통 상처는 잔악한 타인으로부터 혹은 두 번 다시 보지 않아도 될 인물로부터 입을 것 같지만 정작 깊고 아픈 상처는 가족이나 믿었던 이들이 준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는 가족과 신뢰하는 이에게서 무조건적 이해를 기대하고 충족하고 싶어 한다. 그들과 나는 서로를 잘 알고 애정을 품은 불가분 관계여서 그들이 나의 안위를 살피고 염려함이 마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또한 내 생각과 그들의 뜻이 일치하는 데서 애정이 제 기능을 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착각이다.


세상 어느 누구도 당신의 주관과 합일되지 않는다. 부모나 배우자, 자녀처럼 가장 진밀한 관계 안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하물며 외식메뉴를 고르는 사소한 일에서도 갈등은 일어난다. 자신이 원하는 메뉴가 선택되지 않으면 무시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더 나아가서 이런 경우들이 비일비재해지면 존재감이 미미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까지 한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둘째로 태어난 어떤 한 사람은 사람들이 모신에게 첫째 자녀의 이름을 붙여 '00 엄마'라고만 지칭하는 것을 두고 심각한 자기 비애에 빠졌다. 자신은 엄마의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소외감 에서 말이다.


개인마다 느끼는 마음의 상처의 깊이와 부위는 다르다. 누가 들어도 측은하게 여겨질만큼 객관화된 고통이 있는 반면, 지난 경험들 속에서 여러 감정이 복잡하고 무성하게 얽히고 엉켜 지독히 내면화된 상처도 있기 마련이다. 종류를 불문하고 마음의 상처는 삶의 모토와 방향을 재설정하도록 조종한다. 더 이상 내가 아닌 누군가를 의지하고 신뢰하기까지 계산과 의심을 반복하고 있다면 상처가 당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치료법은 고행과도 같은 내게 상처를 안긴 대상을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가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 일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종교나 철학이 말하는 관대와 자비를 베풀어 선한 마음으로 끌어안으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용서의 정의를 다시 내리는 시도를 해보자.


'용서는 자기 보호본능이다.'


모든 생명은 스스로를 지키고 아낄 보호본능을 지녔다. 사람에겐 감정과 이성이 공존해서 본능을 방해받기 일쑤다. 살고자 하는 본능은 종종 상처가 가져온 격한 감정과 용서할 수 없음을 판단하는 이성에 가로막힌다. 그러나 상처를 안긴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나의 삶을 운용할 기력을 되찾으려면 본능에 귀 기울어야 한다. 이때만큼은 본능에 치중해야 한다.


그러한 본능 중 하나가 망각일 것이다.

미셸 공드리 감독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망각으로 또는 기억의 제거로 상처를 봉합 하려는 인물들의 치유책이다. 아픈 기억을 끌어안고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두 인

물은 지우고픈 기억만을 선별해 제거술을 받는다. (영화 시나리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런 제거술을 연구 중이다.) 이후 이들의 인생은 예전의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새롭고 활기찬 삶을 예고한다. 더 이상 걸림돌이 없는 감정의 샘은 고요하고 긍정의 기운만을 북돋는다.


그러나 고작 기억 한 조각이 사라진다 해서 내면의 무언가가 충족되거나 치유되진 않는다. 이 영화의 결말에 다다를수록 우리 안의 생명의 본능과 용서의 의미는 결국 사랑과 신뢰에 대한 회복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상처는 지독한 배신에서 얻어진 응결체로 다시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방벽을 쌓게 만든다. 상처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것은 이 방벽에 갇혀 숨 막히더라도 탈출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비록 잊을 수 없는 경험과 들추고 싶지 않은 성난 감정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생태의 본능에 몸을 맡기고 박동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생태의 근본에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용서란 시름시름 앓는 자신을 구출해서 회복시키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2. 운명적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