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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송 Mar 22. 2020

살기 위해 죽도록 하는 날갯짓

영화 <벌새>

작가들은 지인의 이야기를 팔아먹는다고 한다. 나는 작가도 아니거니와 나 아닌 척하는 내 이야기는 물론이고 지인들의 이야기도 왠지 팔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허락받지 않은 이야기는 본인이 말하기 전엔 이야기하지 않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나를, 나와 비슷한 가까운 사람들을 세상에 보여주기에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겁쟁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벌새>를 보는 내내 주인공 은희(박지후)와 겹쳐지는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고 처음으로 나는 그걸 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미안해. 내가 그 친구에게 마음 속으로 몰래 할 수 있는 말은 이 말뿐이다. 그리고 고마워. 내게 힘든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스무살이 되자마자 운전면허를 따겠단 친구가 있었다. 평생 자신을 무시하는 오빠를 직접 차로 치여 죽이기 위해서. 오빠도 없고 집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나는 황당해서 “그럼 스무살이 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데?” 하고 위로하는 대신 물었다. 그 당시엔 몰랐지만 친구는 어쩌면 복수마저도 두려워 20살 넘어 할 수 있는 일로 유보시키려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자기가 확 죽어버려서 오빠가 아빠에게 혼나고 그들이 자신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살아있는 은희처럼 말이다. 은희처럼 그렇게 행동할 리 없음에도 친구에게만은 그렇게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


은희에게도 폭력을 가하는 오빠(손상연)가 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오빠를 포함한 집 전체가 은희에게 직간접적으로 생채기를 낸다. 은희에게 집은 이해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고 하지만 이해받고 싶은, 그런 곳이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다짜고짜 은희가 느끼는 집의 의미를 관객도 체험하게 한다. <벌새>의 오프닝은 스릴러 장르영화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뒷모습의 단발머리 여학생은 문을 마구 두드리고 있고 아무 정보도 없이 장면 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관객들이 누가 쫓아오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은희(라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는 처절하게 마구 문을 두드린다. 엄마(이승연)를 애처롭게 부른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제야 집 호수를 비춘다. 그걸 바라보는 은희. 자신의 집 바로 아래층 집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층으로 가면 엄마가 곧장 문을 열고 나온다. 오프닝부터 우리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은희의 공포를 체험한다. 밖에서 쫓아오는 사람이 있어 느끼는 공포가 아니라 안에서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 문이 열리고 은희는 집으로 무사히 들어갔지만 이후에도 관객들에게 내내 전달되는 감정은 불안이다.


집뿐만이 아니다. 세상도 은희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신을 사랑한다던 사람들의  마음은 변해 움직이는데 은희는 그 자리에서 그 떠난 마음들을 속절없이 바라봐야만 한다. 남자친구(정윤서)도 단짝친구(박서윤)도 후배(설혜인)도. 은희의 마음을 이해하고 심사숙고하여 조언해주던 영지 선생님(김새벽)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고도 없이 영지 선생님은 한문 학원을 그만두며 은희 곁을 떠나더니 아예 세상을 떠나버린다. 아니, 오히려 예고만 하고 떠나버린다.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 줄게.”라는 공허해져버린 예고. 영지 선생님의 내레이션 직후 영화는 모든 소리를 끈다. 더는 이야기를 들려줄 영지 선생님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 은희와 함께 느끼듯이 적막만이 흐른다. 은희도 죽은 영지 선생님을 생각하고 관객들도 함께 그 짧은 순간, 애도의 시간을 갖는다. 숨을 죽이고서. 물속에서 하나, 둘, 셋... 하고 힘껏 참았던 숨을 ‘헛’ 소리를 뱉어내며 다시 쉴 수 밖에 없듯 다시 세상의 소리가 들리고 은희의 삶도 이어진다. 은희의 삶에서 앞으로도 은희와의 관계의 다리를 끊어버리곤 떠나버리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작별인사도 없이. 은희는 또 아파하겠지. 그럼에도 정면으로 무너진 성수대교를 바라보는 은희의 얼굴은 서글프면서도 어딘가 강인했기에 조금은 안심이 된다. 인사 없이 떠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으로부터 상처 입겠지만 그럼에도 온몸으로 피하지 않고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보이는 은희의 얼굴. 그렇게 영화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은희의 불안한 뒷모습으로 시작해서 서글프지만 환한 은희의 앞모습을 비추며 끝이 난다. 

 

<벌새>의 가장 큰 성과는 사회가, 세상이 사람들이 한 개인을 침투하고 관통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하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아닌 오롯이 체험하게 했다는 것이다. 얼굴에 혹이 난 것도 김정일이 사망했다는 것도 친구와 가족들과 싸운 것도 성수대교가 무너져내린 것도 모두 은희의 삶으로 뒤섞여 우리는 개인과 사회의 경중을 따지는 대신 1994년 은희의 삶을 2시간 40분동안 직접 살아보게 된다. 세상이 자그마한 벌새, 중학생 은희의 몸을 관통해나가면서 은희는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느낀다. 고통을 느끼는 은희는 1분에 90번 날갯짓한다는 벌새처럼 집에서 마구 날갯짓하는 듯한 막춤을 추고 트럼플린을 타며 하늘을 향해 뛰고 또 뛴다. 쉴 새 없이 날갯짓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은희는 커서도 벌새처럼 살기 위해 죽도록 날갯짓을 해야할 것이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안 드러나든 말이다. 집에서 은희보다는 조금 덜 부산스럽게 그러나 역시나 춤 연습하던 아버지 벌새처럼. 혹은 가족들 등쌀에 춤추던 어린 벌새 시절을 잊은 듯해 보이는, 그러나 외삼촌을 하염없이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부단히 날갯짓을 하는 어머니 벌새처럼. 그리고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날갯짓을 하고 있다. 아주- 보편적이고 가장- 찬란한 은희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 가슴 속에 깊이 날아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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