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hye Oct 13. 2020

100%의 비건은 아니어도 괜찮아

불완전함을 마주하며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채식을 한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늘 모든 동물성 식재료를 먹지 않았던 건 아니다. 꽤 오랫동안 나는 30% 정도만 비건이었다. 채식을 하기로 결심하고 처음 한 달은 완전 채식(고기, 우유, 계란, 해산물도 먹지 않는 채식)을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보도 거의 없는 데다 요리하는데 시간도 오래 들고, 오랫동안 내 주 식재료였던 계란과 해산물(나는 오징어, 문어, 쭈꾸미를 너무 좋아했다...)은 바로 끊기가 너무 어려웠다. 한 달을 시도해본 뒤엔 페스코 채식(육고기는 먹지 않되 해산물까지는 먹는)으로 노선을 바꿨다. 그러다 다큐나 책을 읽으면 자극을 받아 비건 지향을 다시 도전했다가, 어려움을 겪은 뒤엔 '집에선 비건으로 먹되, 밖에선 그냥 먹기'로 타협을 봤다가.. 실패와 도전을 반복하면서 실천 방식을 계속 수정해왔다.


올해 초부턴 다시 대부분의 끼니를 완전 채식으로 먹고 있지만(요즘의 끼니는 95% 정도 비건이다), 그건 내가 요즘 매일 출근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조직 생활을 시작하고, 하루 두 끼니는 밖에서 먹어야 한다고 하면, 내가 실천 가능한 수준으로 기준을 다시 조정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물론 지향점은 계속 유지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아직 환경이 받쳐주지 않고(채식 옵션이 가능한 식당 자체가 많지 않고), 그를 대비한 도시락 싸기를 실패했을 때 나를 너무 미워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내 안에서의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다시 허용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불완전한 채식인의 부끄러움


2년 전 페스코 채식을 할 당시,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 만든 '팟카파오무쌉(돼지고기가 들어가는 태국식 볶음밥. 나는 돼지고기 대신 콩 발효식품인 템페를 사용했다)'의 사진을 SNS에 올린 적이 있다. 그 볶음밥엔 계란이 올라갔다. 그 사진 밑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볶음밥에 돼지고기 대신 템페를 넣으신 것처럼, 계란도 빼시면 어떨까요? 계란을 뺀다고 해서 더 맛없는 요리가 되지는 않을 텐데요. 아시겠지만 닭알은 이러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산됩니다. 비거니즘에 동의하시는 00님이 닭알 사진을 올릴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처음 이 댓글을 마주하고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몰려왔다. 그 사람은 동물권 운동과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에게 지적을 받은 기분은.. 내 나름의 노력에 대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부끄러운 기분도 들고, 한편으로 화도 났다(아니.. 나 말고 육식을 엄청 하는 사람도 많은데.. 왜 돈스파이크 같은 사람한테 안 달고 나한테.. ). 댓글을 본 주변 사람들 몇몇은 내게 "저 사람 누구냐", "내가 이런 극단적인 사람들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어렵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선 게시글을 삭제한 뒤, 그에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저와 잘 모르는 분이 이런 내용을 개인 메세지가 아닌 공개적인 댓글로 다신 점은, 내용과 별개로 무례하게 느껴집니다."라고 메세지를 보냈다. 그는 답장으로 다시 계란의 비윤리적인 생산 방식에 대한 긴 설명을 보내주었고, 내용의 옳음과는 별개로 당시의 나는 그를 차단했다. 몇 분 뒤, 그는 내게 차단당한 에피소드에 대해 어딘가 공유했고, 그의 지인들이 내 집밥이 태그 된 예전 게시글들을 찾아 계란이 올라간 사진마다 "동물 사체 전시 사진을 치워주세요"라는 댓글을 달았다. 마음이 복잡해진 나머지 그들을 모두 차단했다.


이 일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당시엔 그들이 무례하게 느껴져 화가 났지만, 사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댓글을 다는지 알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더 짙게 번졌다. 그들은 강력한 윤리적 동기로 채식을 하고, 더 나아가 공장식 축산업의 비윤리적 행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리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동물성 식품의 소비에 대해 마음이 쓰였을 것이고, 더디고 더딘 변화가 답답했을 것이고, 비거니즘에 동의하는 사람이 그런 것을 소비하고, 사진을 올리는 것에 훨씬 화가 났을 것이다. 나는 그들보다 덜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애초에 그들만큼 문제의식을 절박하게 있게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이런 내가 채식을 한다고 말하고 다녀도 될까? 계속 실천할  있을까? 게다가 나는 관련해서 작게나마 프로젝트도 했는데. 내가 이럴 자격이 될까? 제대로 지키지 못할 바에  하는  나은  아닌가? 이참에 포기해버려..? 하지만 이렇게 지적하는 모습 때문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많은데.. 저런 노선이 전체적으로 오히려 비건에 대한 인식을 후퇴시키는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실천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변명/자격지심이 아닐까? 하는 자기 검열이 시작됐고, 나를 채식주의자라고 말하기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가 급 부담스러워졌다.



‘100%의 비건'이

가능한 목표일까?


비건을 실천해보려던 지인은 그 다짐을 담은 글을 쓴 뒤, 매 끼니마다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됐다고 했다. 지인의 친구는 "'비건'한다고 하지 말고 꼭 '비건 지향'한다고 해야 해!"라고 조언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비건'이라는 명사에 나를 가두면 예외가 없으므로, '지향'이라는 여지를 꼭 남겨둬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애초에 완벽한 비건이 존재할 수 있을까?


최초로 '비건'이라는 개념을 만든 영국의 왓슨 부부는 '비거니즘'은 '최대한 가능하고 현실적인 범위에서 모든 형태의 동물 착취를 지양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최대한 가능하고 현실적인 범위'가 다를 것이다. 나만해도, 요즘은 주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끼니를 완전 채식으로 구성하는 게 가능하지만 작년의 나는 어려웠다. 회사 주변엔 채식 옵션 식당이 없었고, 출퇴근 시간이 길어 매일 도시락을 싸기에도 체력적으로 힘이 들었다. 대학생 때의 내가 비건을 지향하려고 했어도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늘 쪼들렸던 시기였기에, 삼각김밥과 컵라면,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서 주는 피자나 디저트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다. 그때의 내가 채식을 했다면 요일을 정해두고 하는 채식 정도가 그나마 가능했을 것이다. 얼마 전 한 친구는 내게 "비건이 요즘은 특정 누군가들만 향유할 수 있는 고급문화처럼 느껴져. 비건 식당은 다른 식당보다 꽤 비싼 편이고, 해먹을 시간은커녕 밥을 제대로 챙겨 먹기도 힘든 사람들에겐 선택권이 거의 없으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지금처럼 육식이 디폴트인 세상에서, 비거니즘은 신념뿐 아니라 환경, 노동 조건, 체력, 주변 사람의 태도, 함께할 동료의 유무 등이 받쳐줘야 어느 정도 실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손쉬운 비난들은, 자본주의가 열량 높고 조리하기 쉬운 육류를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어떻게 제공해왔는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기도 하다. 가령, 샌드위치와 햄버거는 본디 노동자들의 음식이었다. 식사 시간 줄여서 일 부려먹으려면, 빵 사이에 육류를 집어넣어 후다닥 먹어치우게 하는 게 장땡이었다. 그렇게 현재의 패스트푸드가 시작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윤리적으로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허락한 시간과 열량 공급 체계가 그래서 그런 것이다. 현재의 육류 위주의 식단은 자본주의 재생산 시스템의 결과이기도 하다. - <채식 예능을 만들자 : 두부, 365개의 요리>, 희일이송(페이스북)


모든 형태의 동물 착취도 범위를 딱 잘라 말하기가 모호하다(필연적으로 죽음을 수반하는 경우 당연히 범위에 포함되겠지만). 예를 들어 트러플 오일은 트러플 버섯에서 얻는 오일이라 성분상 비건이며 비건 식당에서도 많이 사용하지만, 희귀한 식재료인 트러플은 '트러플 탐지견'의 노동을 통해 채취한다. 아보카도는 남미 여러 지역의 물 부족 사태를 일으키고, 이로 인해 동식물의 서식지가 심하게 파괴되고 있다. 아보카도와 트러플은 비건일까? 계란에 대해서도 애매한 지점이 있다. 나는 작년에 20여 마리의 닭을 애정을 가지고 기르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다. 나는 거기서 아침마다 닭에게 모이를 주고, 주변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게끔 문을 열어두고, 낳아둔 알을 꺼내 채식 아침 식사에 활용했다. 그 아침 식사는 반-비건적일까? 이런 식으로 생산된 계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찾아봤는데, 그건 괜찮다는 의견, 마찬가지로 닭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비건적이지 않다는 의견이 분분해 보였다. 나는 전자에 동의해서(내가 당시 느낀 건 '수단'으로 삼는다기 보다, '물물교환'의 느낌이었다) 최대한 완전 채식을 지향하기 시작한 후에도 동네 친구가 가끔 가져다주는, '본가에서 기르는 닭이 낳은 알'은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다.



불완전하더라도

지향점을 갖는 선택하기


사람들은 무엇을 먹느냐가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그리고 "비건들의 선택을 존중한다"라고 덧붙인다). 물론 선택의 자유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가 '어떤 색의 벽지를 고를까' 하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비건 세상 만들기>, 175p


결국 비건으로 가는 길은 '비건'이라는 정의에 딱 맞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편으로 받아들였던 육식에 실체에 대해 알고(동물권, 환경, 건강 등 관련된 사실들), 그 앎으로부터 다져진 내 방향성과 기준을 갖고 수많은 선택을 다시 해나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내 선택이 어떤 것들과 연결이 되어있는지 기꺼이 알기로 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해나가는 일은 꼭 비건과 관련하지 않더라도 더 나은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다.


과잉된 육식은 동물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고, 지구의 환경을 크게 오염시킬 뿐 아니라, 개인에게 건강적인 부담도 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기는 고기이기 전에 동물이다. 동물의 죽음으로 만든다. 어떤 죽음으로 만드나. 좁은 우리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를 쪼아 상처를 낼까 봐 부리가 잘리고, 배설물 문제가 해결이 안 되니 배변이 바로 아래로 떨어질 수 있게 철창 위에서 생활하고, 상품가치가 없는 동물들은 애초에 분쇄기에 갈려 다른 동물의 사료가 되고, 기대수명이 10년이 넘는 동물들이 대부분 반년 이내 죽임을 당해 고기가 된다. 우유는 어떤가. 출산한 소에게서만 우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암소는 평생 동안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다. 암소에게 인공수정을 하기 위해 인간은 암소의 몸에 팔뚝을 집어넣어 수소의 정액을 집어넣는다. 인간에게 소젖을 먹이기 위해 젖소가 낳은 송아지는 고기가 되고, 젖소는 고름찬 우유 생산을 반복하다 죽는다. 지구 상 동물 중 30%는 인간, 67%는 축산 동물, 야생동물은 3%밖에 되지 않는다. 엄청난 양의 축산 동물 배설물로 인해 어마어마한 메탄가스가 발생하고, 메탄가스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다. 소고기를 1kg 얻기 위해서는 옥수수 사료가 16kg가 필요하다. 엄청난 수의 가축들을 먹이기 위해, 전 세계 인구를 배불리 먹이고도 남았어야 할 곡류 생산량의 대부분은 동물의 사료로 쓰이고, 세계 어느 국가의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죽는 동안 상대적으로 부유한 국가들 사람들은 과한 육식으로 각종 성인병에 걸린다.  붉은 고기가 당뇨병, 암 등 각종 질병의 확률을 높인다는 사실(실제로 2급 발암물질이고, 가공육은 1급 발암물질 이다), 우유가 유방암 등 각종 질병을 높인다는 사실을 기업-기업에게 돈을 받은 건강 관련 협회들은 계속해서 왜곡하고 있다.


이런 정보들은 채식을 시작할 무렵 모두 알았던 정보고, 지금도 많이 나오는 이야기다. 다큐와 책을 접하며 꽤나 충격을 받긴 했지만.. 사실 당시 내 행동을 100% 수정하진 못했다. 앎과 실천이 완벽히 연동되지 않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하는 선택을 하는 인지부조화 상태에 빠질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성 식재료에 주저하는 순간이 많아졌고, 선택권이 있을 때나 체력이 허락하는 한에서는 앎과 평행하는 선택을 할 때가 조금씩 더 많아졌다. 앎은 고기를 그저 '고기'로만 볼 수 없게 했다. 고깃집 간판에 해맑게 웃고 있는 돼지/소/닭 그림을 보는 게 많이 불편해졌다. 완벽한 비건이 되기엔 부족하더라도, 고기 없는 식탁이 많아졌고, 일주일에 5번은 먹던 닭고기를 안 먹게 됐다. 그전까지 내가 했던 집밥은 거의 고기+양념에 의존한 레시피가 많았는데, 선택하지 않을 것에 대한 지향점이 생기고 그 기간이 늘어나면서 내가 만들 수 있는 채식 메뉴가 늘어났다. 해먹은 경험과, 외식할 때 갈 수 있는 식당을 찾아보던 경험, 같이하는 친구들이 늘어나는 일이 몇 년간 누적되면서 나는 이제야 계란과 해산물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식생활의 리듬을 찾았다. 누군가는 육식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듣고 한 번에 행동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환경을 세팅하고, 셀프 노하우를 익히고… 하는데 2년 정도의 시간이 들었다. 이마저도 완전하진 않고, 여행을 가거나, 타인(특히 어른)과 식사하거나, 누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거나 할 때는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열어두고 있다.



완전하지 않은 나라도,

해볼 수 있는 것


댓글이 달리고 한동안 나는 이중 검열에 시달렸다. 더 엄격하게 지향하는 사람들의 피드를 보면서 불량한 채식주의자로서의 나 자신을 검열하게 됐고, 채식에 대해 이해가 거의 없거나 많이 조심스러워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너무 엄격해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과 신념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런 마음들은 종종 나를 넘어지게 하고, 스스로에 대한 비아냥을 쏟게 했다.


이제는 거의 그러지 않는다. 비교 대상을 완벽한 수준에 맞추지 않고, 예전에 나에 두며 지금의 다른 실천들에 의의를 둔다. 그리고 하루 한 끼 채식, 비건 위크, 일주일 하루 채식 등등의 방법으로 조금이라도 시도해보려는 친구들이 생기면 기쁜 마음으로 지지한다. 그들이 자주 실패하더라도, 함께 어떤 방향성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쁘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육식이 보편인 세상에서, 그 마음을 가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불완전한 채식에라도 호의적인 주변인들이 많아지도록, 익숙하고 새로운 채식 생활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싶다. 고기 없이 어떻게 사냐는 물음에 고기는 동물 사체라고 이야기하기보다, 고기 없이도 맛있는 음식들을 함께 많이 공유하고 싶다. 그렇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걸 믿을 수 있게, 그 선택지를 늘려나가는 과정을 즐겁게 함께하고 싶다.


돼지고기 대신 템페를 넣은, 계란이 올라간 팟카파오무쌉을 먹었던 친구는 채식으로도, 외관상으로나 맛이나 태국에서 먹었던 맛이랑 정말 비슷하다며 좋아해 줬다. 그 친구는 채식에 호의를 가진 뒤로 종종 외식할 때 비건 친화적인 식당에 가고, 장바구니에 가공육 대신 템페를 넣을 때가 많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나는 주변과 연결된 나의 쓸모를 느낀다. 나는 계속해서 시도하고 실패하는 이 과정을 친구들과 공유하고, 서로에 대해서 박수쳐주면서, 음식이든, 콘텐츠든, 그림이든, 내가 만들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 보면서, 더 나은 선택을 해나갈 사람들을 응원할 것이다. 이 정도의 마음이라면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비건을 즐겁게 지향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