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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ye Jul 03. 2024

회사 폐업 후, 동료들과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같이 머리 쓰던 사람들과 손발쓰기

"이제 뭐 할거야?"


회사 운영 종료로 인한 퇴사 후, 내가 한동안 가장 싫어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 질문만 마주하면 너무나 까마득해져서, 개인 SNS에 "한동안 생산성에 대해 생각하는 걸 멈추고, 자연을 가까이하며 스스로와 시간을 많이 보낼 예정이니 앞으로 뭐할거냐는 질문 금지~!"라고 썼다. 진심이었다. 이제는 일과의 관계맺기도,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져야겠다 싶었는데, 퇴사 직후에는 그걸 생각하고 계획할 에너지가 없었다.


한동안의 유일한 목표는 '많이 걷기'였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잔잔바리로 역할이 많은 '회사 내 N잡러'처럼 일했기 때문에, 머릿 속 상태는 늘 '번잡함'이 기본 상태였다. 무언가 해야할 것 같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했다. 그런 마음상태를 벗어나,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을 향해 온종일 자연을 걷기만 하는 게 유일한 투두 리스트'인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혼자 걷는 것도 좋지만 함께 실직자가 된 동료들과도 걷고 싶었다. 혼자서는 '걸어야지' 마음 먹더라도 몸을 일으키는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타인과 약속을 하면 어떻게든 나가하니까. 또 동료들과는 회사가 닫을 때 즈음 매일 술 혹은 커피를 마시며 '어쩌다 회사가 이렇게 됐을까' 혹은 '앞으론 어떻게 살까'하는 아쉬움과 불안 섞인 대화를 주로 나눴던 터라, '테이블에 모여 앉아 회사 이야기 나누기'가 주 목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걷기를 주 목적으로 두고 따로 또 같이 걸으며 혼자였다가 여럿이었다가 하는 시간을. 그렇게 퇴사 후 한 달 동안 "같이 걷고 싶다"고 하는 동료들과 무주 덕유산길, 북한산 둘레길, 안산 둘레길을 걸었다. 




어느 날에는 남산 둘레길을 걷기로 했는데, 해당 날짜의 비 예보를 전날에서야 접했다. 이미 만나기로 약속을 취소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제안했다.


"비오니까 모여서 반찬이나 만들면 어떨까요?"


걷기로 한 멤버들이 다음 날 우리집에 모두 모였고, 우리는 마트에서 열무와 생, 마늘, 홍고추, 방울토마토, 레몬 등을 샀다. 옹기종기 둘러 앉아 열무를 씻어 다듬고 홍고추와 생강, 마늘, 배, 사과를 갈아 양념을 만들어 열무에 버무렸다. 방울토마토에 십자 모양 칼집을 내 끓는 물에 데쳐 껍질을 벗기고, 락앤락에 담아 레몬즙과 생레몬, 매실청, 물을 넣어 차갑게 식혔다. 한시간 반 만에 여름 반찬인 토마토 츠케모노와 열무김치가 만들어졌다. 


토마토 츠케모노와 열무김치


우리는 다들 1~2인 가구였고 대부분 반찬을 사먹거나, 한그릇 음식만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었기에 김치를 담가보는 경험 자체가 모두 처음이었고, 꽤 맛있었다. 만든 반찬은 각자의 락앤락 통에 담고, 바로 국을 끓이고 전을 부치고 만든 반찬을 그릇에 담아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만나서 술을 마실 땐 한 사람당 2~3만원이 기본으로 나왔지만 이 모임에서는 인당 만 원 이하의 재료비가 나왔다. 


....이거, 굉장히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모임이잖아?


한동안은 모두들 재취업에 노력하기보다는 멍하게, 쉬면서 시간을 보낼 사람들이니 "앞으로도 이렇게 한 번씩 이렇게 반찬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고, 이 모임의 이름을 '반챤챤'으로 정했다. 같이 만들 반찬 종류의 기준은 암묵적으로 이렇게 정했다. 1) 제철 식재료를 활용한 반찬일 것 2)비건일 것 3) 혼자 하면 절대 안하겠지만 함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손질한다면 해볼만한 것으로 만들기.


그렇게 다음 모임에는 오이지와 버섯장아찌를 담갔고, 그 다음 모임에는 오이를 이용해 차가운 만두를 빚었다. 가을에는 밤과 연근을 졸여 밤조림과 연근조림을, 무를 볶아 무나물을 만들었고, 겨울에는 두부와 부추로 속을 채운 따뜻한 만두를 빚었다. 오후에 만나 집에서 차를 한 잔 하고 반찬을 열심히 만든 뒤, 저녁에는 저녁상을 차리고 편의점에서 술을 사와 만든 음식과 함께 먹었다. 

손질하는 동안 테이블에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함께 있으면 필연적으로 회사 얘기를 하던 사람들과 이제 그 내용으로만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대신에 요즘 사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나 세상 이야기, 재밌게 본 영화, 지난번 반찬에 대한 후기와 다음에 만들고 싶은 메뉴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꼭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도, 모두가 함께 손작업을 하고 있었기에 대화의 공백도 평온했다. 대화가 뜨는 시간을 메우기 위해 애쓰지 않고, 이야기하다가도 "밤 이제 삶을까요?" 처럼 눈 앞에 있는 일거리로 돌아오는 것도 좋았다. 


또 다른 기쁨은 해먹는다는 후기를 들을 때였다. 매번 함께 모임을 꾸리는 동료 중 한 명은, "이 모임에서 직접 무언가 만들고 함께 술을 나눠먹는 게 좋기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이라, 다른 친구들과 만날 때도 집에 초대해 안주를 만들어주게 됐다"는 후기를 전했다. 


직장에서 만나면 친구가 되기 어렵다지만, 주로 일과 회사 이야기만 하던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성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2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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