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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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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릭 Dec 23. 2022

헝클어진 휴가계획

나의 올해 마지막 휴가 계획은 나름 괜찮았다. 쌓아둔 책을 읽고, 13년 만의 귀환에 감격하며 '아바타2'를 보고, 밀린 운동도 하고... 하지만 토요일 친정엄마의 코로나 확진 소식이 들려왔고, 그날 둘째는 어딘가 지친 기색으로 까무룩 잠들었다. 다음날 부랴부랴 병원에 갔더니 돌아온 것은 'A형 독감 양성입니다'라는 소식. 


다음 타자는 나였다. 화요일 새벽 갑자기 코가 확 막히고 두개골 윗쪽에 피가 몰리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아침에 영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결과는 또 'A형 독감 양성입니다.' 첫날은 열과 오한에 시달리다 기절하다시피 잠들기를 반복했다. 오늘은 4일차. 이제는 평소 몸상태의 80% 정도까지는 돌아왔다. 독감은 정말이지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방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요며칠 간 뉴스는 먼나라 이야기였다. 아픈 날들은 무료하고 지겹지만, 그 덧없음을 이겨내려 소셜미디어를 눈팅하는 것조차 제법 에너지가 드는 일이라 '좋아요' 버튼을 누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책장 넘길 힘도 없어서 평소에는 거의 업무용으로만 보던 유튜브를 유희용으로 보는 일이 잦아졌다면 핑계처럼 보이겠지만 진짜다. 


어젯밤에서야 모처럼 TV를 켰다. 침대 옆에 함께 누운 아이가 '어른들 드라마는 총 쏘는 거 나와서 무섭다'며 뉴스를 틀어달라길래 YTN으로 채널을 돌렸더니 웬걸, 세상의 풍경은 여전하다. 정치인들은 싸우고, 노동자들은 처절하고, 이태원 참사 유족들은 애통하고. 불과 며칠 만에 세상이 좋아질 것이란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았다만, 이럴 때는 순간 허무해진다. 줄리언 반스의 'The sense of an ending'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바꾼 사람은 정말이지 천재다. 괄호 치고 '나쁜'을 추가한다면 더없이 들어맞는다. 


찜찜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2014년 여름, 안산의 법정에서 들었던 어느 학생의 말을 다시 접했다.


"이 사고 때문에, 다른 분들이 하는 욕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누리꾼들이 포털 같은 데서 욕을 많이 했다. 우리는 그냥 수학여행을 가다가 단순히 사고가 난 게 아니다. 사고 후 대처가 잘못돼 이렇게 많이 죽은 것이다. 이런 걸 교통사고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http://omn.kr/9g4y)"


너무나 무섭게도 8년 만에 똑같은 슬픔의 말들이 터져나오고 있다. 그리고 거리의 풍경은... 길바닥으로 내몰리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새삼스럽지 않다. 어쩐지 '휴가 계획'이라는 것을 세웠던 내 자신이 사치스러워 보인다. 


글밥을 오래 먹으면 이 감정이 잦아들 줄 알았는데,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일들을 목격하는 순간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는다. 따뜻한 인사를 건네야 할 연말에, 다가오는 새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시기에, 자꾸만 이 각자도생의 시대를 건너야 한다는 두려움과 절망감이 커져간다. 헝클어졌던 휴가 계획만큼 부디 이 마음도 산산이 흩어졌으면. 미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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