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닐 트리포노프 Daniil Trifonov는 클래식에 크게 관심이 없다면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피아니스트 조성진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의 이름이 좀 더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다. 손열음과의 인연까지 생각하면 더욱더. 그는 손열음이 2위를 차지하고 조성진이 3위를 차지한 2011년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었다. 그리고 조성진이 영광의 1위를 차지한 2015년 쇼팽 콩쿠르의 바로 전 대회인 2010년 쇼팽 콩쿠르에서 3위를 차지한 바 있다. 그 대회는 임동혁 임동민 형제가 3위를 차지한 2005년 대회의 다음 대회이기도 하다. 그는 1986년 생인 손열음보다는 다섯 살 어리고, 1994년 생 조성진 보다는 세 살 많다. 세 사람 모두 오늘과 내일의 클래식 음악계를 책임질 젊은 월드 클래스 피아니스트들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중 트리포노프가 스타성이나 인지도 측면에서 가장 앞서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대한민국을 제외했을 때.
2011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삼남매. 가디언, 경향신문, 뉴욕 콘서트 리뷰
나는 트리포노프를 정통 러시아 피아니스트라고 여겼으므로 그가 미국을 싫어하지는 않더라도 그다지 큰 관심은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My American Story : North'라는 제목의 이 음반을 트리포노프가 낸 것을 보고 작은 충격을 받았다. CD 두 장 분량의 이 음반은 제목이 암시하듯 미국의 피아노 음악들을 가득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 보면 트리포노프는 미국과 인연이 깊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클리블랜드 음악원 Cleveland Institute of Music에서 공부했고, 2017년부터 현재까지 뉴욕에서 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성인이 된 후로는 거의 계속 미국을 터전 삼아 활동해 왔던 것이니, 반은 미국인인 셈이다.
음반에는 재즈와 스윙, 모더니즘, 미니멀리즘, 그리고 대중적인 영화음악까지를 망라한, 지난 100여 년 간의 미국 피아노 음악이 수록되어 있다. 두 개의 30여분짜리 피아노 협주곡이 처음과 끝에 배치되어 균형을 맞추어 준다.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1925년 작 조지 거슈인 George Gershwin의 F장조 피아노 협주곡이고,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메이슨 베이츠 Mason Bates의 따끈따끈한 2022년 신작 피아노 협주곡이다.
'랩소디 인 블루'의 익숙한 멜로디로 잘 알려진 거슈인의 곡은, 재즈와 클래식을 접목한 것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작정하고 만든 정통 클래식 스타일의 3악장 짜리 협주곡으로, 트리포노프의 말을 빌리면 '시카고의 어두운 거리를 배경으로 하는 흑백영화의 추격 씬'이 연상되는 곡이다.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DJ이기도 한 1977년 생 미국 작곡가 메이슨 베이츠의 피아노 협주곡은 트리포노프를 위해 쓰여졌고 그 초연이 이 음반에 담겨 있다. 베이츠는 생존하는 작곡가 중에서는 미국 오케스트라에 의해 두 번째로 많이 연주되는 작곡가라고 한다. 이 곡은 귀를 녹이는 듯한 감미로운 멜로디와 할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들었을 법한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비르투오소 피아노 연주와 적절히 결합했다. 아주 듣기 편하고 달달한 곡이다.
그 외에도,
재즈 피아니스트 아트 테이텀 Art Tatum과 빌 에반스 Bill Evans가 각각 편곡한 'I Cover the Waterfront'와 'When I Fall in Love' 등의 재즈 넘버,
존 애덤스 John Adams의 'China Gates'와, 존 코릴리아노 John Corigliano의 'Fantasia on an Ostinato' (베토벤의 7번 교향곡 2악장 주제가 사용되었다.) 등의 미니멀리즘 음악,
영화 <야망의 함정>에 사용되었고 래그타임 리듬이 흥겨운 데이브 그루신 Dave Grusin의 'Memphis Storm'과, 토마스 뉴먼 Thomas Newman이 작곡한 <아메리칸 뷰티>의 사색적인 테마곡,
그리고 연주에 있어서나 감상에 있어서나 도전적인 아론 코플랜드 Aaron Copland의 모더니즘 음악 'Piano Variations'
등, 달콤한 음악부터 매우 씁쓸해서 다가가기 꽤 까다로운 곡까지 이 음반이 담고 있는 미국 피아노 음악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심지어 4분 33초 동안 연주자를 피아노 앞에서 손을 놓고 우두커니 있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존 케이지 John Cage의 4'33''도 담겨 있다. (그런 작품을 어떻게 음반에 담았을까? 뭐 굳이 확인을 권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흔히들 클래식 음악가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편견이 있다. 그들이 음악적으로 편협하고 완고해서 정통 클래식 이외의 음악은 무조건 배척할 것이라는 편견. 나이 지긋한 클래식 음악가들에게는 어느 정도 해당할 수 있는 얘기겠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 클래식 음악가들은 그런 편협함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은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를 꽤 본다. 음악은 때와 장소에 따라, 그리고 취향과 목적에 따라 최적으로 여겨지는 장르가 다르므로, 자신이 하는 음악과는 다른 종류의 음악을 무조건 적대시할 필요가 없다. 운전할 때, 운동할 때, 모임의 흥을 돋울 때, 음악의 구조와 깊이를 음미하고자 할 때, 등 상황에 따라 듣는 음악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운전하거나 운동할 때는 클래식 음악 대부분이 갖고 있는 광폭의 음량 대비로 인해 작게 연주되는 부분은 소음에 묻혀 버리므로 클래식이 좋은 음악이 아닐 수 있다. 이에 반해 천변만화하고 지적으로 생각할 거리를 끊임없이 던지는 클래식 음악은 조용히 음악을 음미할 때에는 최적의 선택일 수 있다. 현대의 젊은 클래식 음악가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음악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들어가기에, 그들의 음악 활동 중 상당 부분을 장르의 벽을 허무는 작업에 할당한다. 그들이 대중적인 음악 활동을 통해서 경제적 이익을 얻는 데 도움을 받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전혀 다른 세계의 음악을 접함으로써 보다 풍부하고 확장된 경계를 갖는 음악 세계를 구축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트리포노프의 이번 앨범은, 러시아 정통 피아노 레퍼토리로만 점철된 청소년기까지의 시기를 지나서 다양한 음악의 용광로로서의 미국으로 이주한 후 그가 보유하게 된 넓고 깊어진 음악 세계를, 달콤하거나 쌉싸름한 뷔페로 차린 음악적 성찬이라 하겠다.
참고로 트리포노프가 후속작으로 'My Ameican Story : South', 즉 라틴 아메리카 음악에 관한 앨범을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