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신을 4차까지 맞았고, 개인적으로는 크게 고생하지 않고 지나왔으며, 대부분의 마스크 의무는 해제되었다. 아마 끝끝내 백신을 한 번도 맞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정말 건강에 치명적인 위험인자가 있어서 맞고 싶어도 맞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 때문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그 정도의 확신은 없더라도 막연한 두려움이 커서 맞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의 경우는 여러 가지 규제의 불편함 덕분에 아마 끝까지 버티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백신은 1차적으로는 개인의 안전을 위함이지만, 이런 대규모 감염병의 경우 사회적인 상호 감염을 막기 위한 목적도 크기 때문에 접종 여부를 그냥 '서로의 생각이 다르니 존중하자'로 퉁치고 넘어가기엔 여러 문제가 있다. 그러니 이례적으로 승인에도 속도전을 내고, 미접종에 따른 여러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장치들이 있었다.
상대방의 '다른 생각'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생각'에 훨씬 거친 반응을 보인다. 마치 대통령 선거에서 서로 다른 사람을 찍었을 때처럼. (실제로 그것과 백신이 불필요하게 상관관계를 갖긴 했지만.)
백신의 효과는 통계적으로 충분히 유의미했다. 당연히 통계적 예외가 일말의 불안으로 남는다. 검증의 시간이 짧을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정도 예외 때문에 백신을 맞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일상생활과 의료행위도 불가능할 것이다. 실재하는 부작용과 의료사고 피해자들의 문제도 분명히 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많은 의사결정을 할 때 비슷한 경고를 들어도 감수하는 선택을 한다. 문제는 강력한 백신 반대론자들과는 별개로, '막연하게 부작용이 두려워서' 백신을 맞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이런 통계적 합리성으로 설득하려 드는 것은 박자가 안 맞는 일이라는 것이다.
코로나에 감염되는 것은 이들에게 최소한 '내가 조심하면 피할 수 있는 것', 혹은 걸리더라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인데, 백신은 내가 능동적으로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선택한 결과에서 오는 고통이 더 두렵다. 그 앞에서 객관적인 확률이나 통계는 의미를 잃는다. 어차피 코로나에 걸려도 재수 없으면 최악, 백신 부작용도 재수 없으면 최악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똑같다. 맞는다고 안 걸린다는 보장도 없다며. 10프로든 1프로든 내가 걸리면 100프로인 러시안룰렛으로 경험된다. 피할 수 있는 건 다 피하고 싶다. 코로나도 피하고 백신도 피하고. 백신도 안 맞고 방역수칙 열심히 지키면 둘 다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드라마 <D.P>에 나와서 유명해진 '몬티홀 문제'도, 수학적으로는 처음 선택한 문을 바꾸는 게 더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처음 선택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선택을 바꿨는데 원래 선택에서 자동차가 나와버리는 것이 그 반대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선택하지 않아서 겪는 고통보다, 능동적인 선택이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훨씬 크다. 내 책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초입에 소개되어 더 유명해진 트롤리 문제도 마찬가지다. 스위치로 선로를 바꾸어 다섯 사람 대신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괴롭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겠다고 답한다. 하지만 문제를 살짝 바꿔 다리 위에 있는 멀쩡한 한 사람을 일부러 밀어 떨어뜨리면 다섯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조건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거부당한다. 똑같이 한 사람 대신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 해도 능동성이 더 개입될수록 사람들은 부담을 느낀다.
약간 다른 얘기지만, 사람들이 자동차 사고보다 비행기 사고를 더 걱정한다는 이야기는 휴리스틱 사례로 제일 많이 언급된다. 실제 사고확률은 비교할 수 없이 비행기가 안전하지만, 비행기 사고는 대부분 자극적으로 보도되기 때문에 더 공포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실 어쩔 수 없다. 사고확률이 1/98이든 1/7,178이든 내가 탄 비행기가 사고 나면 난 그냥 100프로 죽는 거니까. 자동차는 사고가 나도 왠지 어떻게 내가 해볼 여지가 있을 거 같은데, 비행기는 꼼짝없이 남의 손에 맡겨진 채 10km 상공에서 무조건 죽을 거란 공포가 압도적이다. 주체성을 잃는 공포다. 백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부작용의 가능성이 0.5%라도 있는 백신을 맞는 일은 내가 어떻게든 몰아볼 수 있는 자동차 대신, 남의 손에 나를 맡긴 채 상공 10km로 떠오르는 일일 것이다.
거기에 과학적인 자료를 계속 들이밀며 답답해해 봐야 소용없다. 그게 설득이 되면 복권사업은 진작 다 망했어야 정상이다. 1프로든 0.1프로든 그 작은 숫자 안에 나를 넣고 상상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 숫자보다는 백신 맞고 시력을 잃었다거나, 멀쩡했던 사람이 한 달 만에 암 진단을 받았다는 뉴스가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책임도 안 져준다는데.
뉴스는 늘 의외로 여겨지는 일을 다룬다. 모두가 코로나를 두려워하고 있으면 '오미크론은 생각보다 별 증상 없더라'는 이야기가 더 눈길을 끈다. 모두가 백신을 맞고 있으면 '백신 맞고 죽었다더라'는 소식이 뉴스가 된다. 근래 언론사를 자처하며 난립하는 수많은 뉴스들 중에 자격 없어 보이는 것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희소해 보이는 일'이 더 뉴스 가치가 높은 것은 태생부터 그랬다. '사람을 무는 개'에 대해 더 많이 알리고 조심해야겠지만, '사람이 개를 물었다'가 뉴스가 된다는 얘기는 '신문학개론' 초판 첫 장부터 'News Value-의외성'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실은 백신뿐 아니라 수많은 사회통계가 다 그렇다. 숫자가 뭘 말하든, 내가 경험하는 현실이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게다가 소셜 미디어로 그 어느 때보다 '사례'들을 무한하게 만날 수 있는 시대다. 수만건의 표본으로 이루어진 통계보다, 열 개의 실감 나는 사례가 사람을 움직일 때가 많다. 사람은 이성만으로 살지 않는다. 그런 존재가 아니다.
통계와 자료가 말하는 바와 반대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한들, '무지하고 답답한 인간들' 취급해 버리면 점점 더 끝으로 몰아내는 일일 뿐이다. 사회와 정치에 열의가 많은 사람일수록 이런 이들이 더 많이 눈에 띄고 더 마음이 동할 텐데, "너새끼가 틀렸어!"라는 말을 듣고 수긍하고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나. 그런 사람은 통계와 자료를 뛰어넘는 인격자다.
천인공노할 범죄자가 아닌 이상, 생각이 다르면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일단 이들이 어떻게 느끼고 왜 그러는지를 짚어봐야 할 텐데, 모두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럴 여력이 있는 개인도 시스템도 없겠지. 근데 그럼 다른 목적이 있는 이들이 써먹기 위해 들어주는 척 할 거다.
모든 유명한 심리학 실험에는 늘 한 가지 맥락이 제거되어 있는데, 실험 대상의 '인간관계'다. 이런 사고실험은 항상 완전히 독립적이고 진공상태인 인간을 가정하고 이루어지지만 실제로 그런 인간은 없다. 그래서 늘 '맥락'을 추가한 후속실험이 뒤따르는데, 보통 이런 후속실험들은 잘 안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
트롤리 실험에서도 철로 위에 묶여 있는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다리 위의 모르는 사람이라도 밀어버리겠다는 비율이 급증했다. 가장 유명한(그리고 여러 가지 허점이 많은) 실험 중 하나인 '마시멜로 테스트' 역시, 마시멜로를 먹지 말라고 한 선생님이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일수록 끝까지 참아내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숫자로 설득할 수 없는 누군가라도, 관계 속에서는 가능할 때가 많다. 시스템이 여력이 없을 때는 여력을 내게 만드는 사적인 관계들이 움직여야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