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추락의 해부>
하나.
아내와 결혼해서 사는 몇 년 동안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너무 좋아서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음에도, 인생이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2시간짜리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눈부시게 행복한 장면을 보고 있는데 아직 상영시간이 한 시간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의 불길함. 찬란할수록 불안은 커진다. 이야기 속에서 처음으로 죽는 인물은 최대한 매력적으로 그려주어야 그 죽음의 깊이가 더 커진다. 그러니 행복이 차오를 때마다 그 부력에 불안감이 함께 떠올랐다. 얼마나 극적인 낙폭을 보여주려고 이렇게 높이 들어올리나.
둘.
모든 종류의 예언을 듣는 것을 싫어한다. 사주팔자, 타로카드,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지는 포츈텔링. 그게 무슨 괴력난신이라 내 신앙으로는, 혹은 내 이성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그런 문제라서가 아니다. 예언을 들음으로써 내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는 것이 싫어서다.
모든 예언문학의 성취는 예언을 듣는 것에서부터 이루어진다. 라이오스 왕이 오이디푸스에게 끝내 죽임을 당한 것도 예언을 듣고 아들을 내버렸기 때문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마구간에서 태어나 예언을 성취한 것도 헤롯왕이 모든 아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듣는 순간 벗어날 수 없어진다.
그러니까 그걸 들음으로써 굴레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는 어쩌면 그 모든 괴력난신의 권위를 누구보다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셋.
이 모든 것은 내가 삶을 서사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삶은 대부분 지리멸렬하고, 어쩌다 반짝이고, 서사라면 터무니없이 조악한 수준일 테지만, 그럼에도 삶을 이야기의 눈으로 보는 습관은 불필요한 두려움과 필요한 희망을 함께 쥐여준다. 그것은 내가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혹은 그걸 만드는 직업을 가져서, 그것도 아니면 모태신앙 기독인들에게 어쩔 수 없이 배어있는 세계관 때문일 수도 있다. 인생은 천로역정이니까.
아니, 이것들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나의 서사다.
넷.
사실 우리는 모두 늘 우리의 삶을 서사로 받아들인다. 유치원 때부터 그림일기 그리라고 숙제 내주는 것도 서사화 훈련을 하는 거다. 오늘 너의 하루 중에는 어떤 사건이 너에게 이야깃거리였니. 그래서 너는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니. 언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인생의 무한한 허무 앞에서, 이 훈련을 미리 해두어야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던 어른들의 문과적 훈련되시겠다. 어차피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선택적으로 남아있는 '편집된' 기억 속에서 연출의 의도를 엮어내는 일을 숨 쉬듯 하고 있다. 과거의 서사화, 그러니까 '난 이런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되었어'는 누구에게나 거의 본능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나는 자꾸 미래까지 서사로 받아들이는 버릇 때문에 이리도 번거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정도가 차이일까.
이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기본 소양이냐면, 우주 속에서 우리 존재의 처절한 미약함을 발견한 나머지 그 무시무시한 허무를 한순간도 잊을 수 없는 저 찬란한 과학자들도, 우리가 그 허무에 짓눌릴까봐 친절하게 서사를 부여해 이야기해 주지 않는가. 우리는 모두 별의 조각들이라고. 이야기가 있어야 이 삶을 버틸 수 있다.
다섯.
<추락의 해부>는 삶을 서사로 보는 관점에 대한 서사다. 이 영화 속에서 삶은 여러 차례에 걸쳐 '텍스트'가 된다. 대놓고 '작가 부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들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서사화 하는지 보여준다. 인생을 가지고 기워낸 '텍스트'는 다시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 인생 자체를 다시 텍스트화한다. 이들의 삶은 겹겹이 살이 붙은 이야기로 뒤덮인다. 힘껏 부여한 성공과 실패의 서사, 좌절과 연민 같은 것들이 덕지덕지.
마지막 다니엘의 증언은 이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불과 몇 주 전의 기억도 혼란스러워하던 다니엘은, 1년이 훌쩍 넘은 아버지와의 대화를 토씨 하나까지 기억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재현한다. 아버지가 말하는 순간의 입모양까지 맞추어 보여주는 연출은 이것이 위증인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 장면으로부터 다니엘은 자기 인생을 서사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어떤 서사가 되게 할지 선택했다.
텍스트는 늘 해석되기 위해 놓여있다. 아스피린을 잔뜩 먹여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 갔는데도 다시 주인 곁에 고개를 가지런히 내려놓는 반려견처럼.
여섯.
영화에 대한 감상과 별개로, 내 뇌리에 남은 장면은 조금 엉뚱하지만 따로 있다. 시종 불손하게 신문을 진행하던 검사의 법정씬이다. 그는 종종 엑셀을 끝까지 밟은 자동차처럼 매섭게 질문을 퍼붓다가, 어떤 대답을 듣는 순간 갑자기 시동이 꺼진 것처럼 신문을 끝내고 돌아선다.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뜻이겠지. 보아라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예능은 이상한 장르다.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대사를 직접 써서 배우의 입에 집어넣어주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연출하는 이들도 꾸준히 있긴 하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성을 표방하며 연출의 의도를 교묘하게 숨기는 장르도 아니다. 연출된 장면이고 의도가 선명한 동시에 출연자의 언어를 완벽하게 통제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말을 직접 시키기엔 모양이 빠지는 일이라, '이런 말을, 그것도 기왕이면 진심으로 해주길' 은근히 바라며 계속 몰아붙이고 질문한다. 그리고 원하는 답을 들은 순간, 저 불손했던 검사처럼 휙 돌아선다. 이상입니다.
화면 속 타인의 입을 바라보며, 거기서 원하는 대답을 얻기를 바라는 편집실에서 내내 살다가, 오랜만에 찾은 극장의 엉뚱한 영화 법정 장면에서 기시감을 느끼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내 삶에서 서사를 찾는 걸 넘어서 다른 이의 삶을 텍스트로 만들고 있다. 아주 정중한 태도로 그에게서 주도권을 넘겨받아 온 다음에.
일곱.
하지만 예능 촬영에서 정말 빛나는 순간은, 연출자조차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그 의도를 넘어서는 장면을 만나는 순간이다. 여전히 듣는 일은 귀하다. 어떤 서사는 나의 부여를 상회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서사는 압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