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백>이 불러온 기억들
10대 시절 나를 기억하는 학교 친구들이 있다면 아마 대부분 '만화 그리는 애'로 기억할 것 같다. 쉬는 시간에는 무조건 책상에 앉아 쉴 새 없이 만화를 그리고, 급우들이 그걸 가져가 돌려보며 즐거워하는 일이 일상의 가장 큰 기쁨 중에 하나였으니까.
아마 반마다 그런 애는 남학교 여학교 할 것 없이 꼭 한 녀석씩 있기 마련이고, 작품 자체로도 아름다웠던 <룩백>은 아마 그런 시절을 보냈던 친구들에게는 더 생생하고 아련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꼭 주인공 '후지노'와 같은데, 지금 돌아보면 정확히는 그림보다는 이야기에 더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고, 그래서 정말로 그림을 탁월하게 잘 그리는 친구를 보면 너무 부러웠기 때문이다. 왜 내 손은 저렇게 움직이지 못하는지 괴로워하면서.
그래서 꽤 많은 관객들은 두 주인공의 관계와 우정에서 가장 큰 감동을 느낀 것 같지만, 나는 영화 내내 나오는 저 뒷모습을 보는 일, 'look back' 하는 일이 가장 눈물 났다. 저렇게 앉아있는 저 뒷모습의 주인공은 그저 어딘가를 향해 치열하게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저 순간들을 보내지만, 지나고 보니 저렇게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면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연소시키던 저 순간들이 그 자체로 얼마나 빛났던가 절절하게 느껴져서.
영화를 보고 한참 지나 우연히 '2001년 12월 발간'이라고 적힌 중학교 만화부 회지를 발견했다. 나름 펜터치부터 먹칠에 스크린톤까지 구색을 다 갖추고 심지어 완결까지 냈다. 벌써 24년 전, 태어나서 저 회지를 그릴 때보다 저 회지를 그리고 지금까지의 시간이 거의 두 배 가까운 시절이 지났다. 중학생 시절이라는 건 정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구나. 그땐 뭘 느꼈길래 저렇게 만화에서도 인생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했을까.
지금 다시 들춰보니, 확실히 내가 몰입했던 건 이야기였다는 사실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림은 처음엔 조금 정성을 들인 것 같은데, 뒤로 갈수록 마감에 맞추느라 날아가는 게 보인다. 마감에 쫓기는 일은 20년째 똑같구나. 대강 그림 파악만 되면 디테일 대충대충 날린 것 좀 봐라. 선도 자 좀 대고 긋지. 원래 이런 인간이었구나.
그리고 연출이나 대사를 쓴 방식에서도, 그 시절 일본 만화에 파묻혀 살았었다는 게 고스란히 보인다. 비슷한 세계 안에 갇혀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그 세계의 문법을 빨아들이는구나. 요즘은 만화를 많이 못 보는데, 새삼 저렇게 묻어나는 걸 보고 있으니 새삼스럽다.
그 옛날 교실에서 만화를 그리던 애들 중 대부분은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겠지. 하지만 출판 만화에서 웹툰이 범람하는 시장으로 넘어왔으니, 그중 또 적지 않은 아이들은 지금도 만화를 그리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결국은 이야기를 다루는 일을 하고 있으니, 여기서 그리 멀리 온 것 같진 않다. 종이 위에 새겨진 저 시간이 괜히 애틋하고 귀엽네.
그리고 이승환 님의 <잘못> 뮤직비디오를 보고 캐릭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원고로 그려보려고 시도했던 흔적. 너무 힘줘서 시작한 나머지 결국 완성을 못했다. 역시 마감이 있어야 뭐가 된다.
원고용지의 하늘색 가이드라인들이 오랜만에 반갑다. <룩백> 원작 만화에서는 잘 안 보이는데, 색이 들어간 애니메이션에서는 저 똑같은 원고용지가 잘 보여서 엄청 그리운 기분이었다.
(글씨는 이제 저거보단 예쁘게 쓴다...)
아마 원고를 해본 아이들이라면 다들 느꼈겠지만, 펜터치를 해 놓으면 지저분한 연필선에 적당히 숨겨졌던 그림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발가 벗겨지는 기분이 든다. 평소에는 연습장에 연필로만 그려서 친구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보통 오른손잡이들은 사람을 그릴 때 오른쪽을 보고 있는 얼굴을 그리는 것이 어색해지는데, 그래서 구도 연습할 때 제일 많이 하는 것 중 하나가 오른쪽을 보고 있는 반대편 얼굴을 자연스럽게 그리는 것이다. 게으른 10대의 권성민은 그걸 열심히 안해서 캐릭터가 죄다 왼쪽과 정면만 보고 있다.
내용 없는 일러스트를 그릴 때는 그림에 훨씬 더 공을 들일 수 있었다. 일러스트 그릴 때가 훨씬 신나긴 한다.
일러스트로 그릴 때는 머릿속에 기가 막힌 내용들이 상상으로 알아서 무한하게 뻗어 나간다. 그래서 한 장면 만으로 굉장한 이야기를 그린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말풍선을 넣고, 내용을 전개하기 위한 자세와 구도를 하나하나 그려나가다 보면, 하나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끝까지 쌓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하고 귀찮은 일인지 실감하게 된다. 그걸로 꾸준히 결말까지 그려본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느냐 없느냐가, 그 사람이 결국엔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 같다.
끝까지 맺어본 경험이 정말 중요하다, 만화가 아니라도 뭐든지.
하다못해 독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