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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Jul 17. 2017

떠나간 은어를 그리며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매일 고민하는 일 중의 하나가 아마도 점심 메뉴 정하는 일일 것이다. 직장동료들이 한식이나 중국음식에 대해 싫증을 느끼면 별식으로 가끔 어탕이나 메기탕을 추천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민물고기도 돈 주고 사 먹나?" 하는 소리가 무의식적으로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곤 한다. 이러한 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민물고기가 흔한 지역에서 자라면서 우리가 원하면 물고기를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기에, 아직까지도 민물고기는 거저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민물고기도 종류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인데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은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은어라는 명칭은 주둥이의 턱뼈가 은처럼 하얗기 때문에 생긴 은구어(銀口魚)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이 고기의 피부는 매우 작은 비늘로 덮여 있어 겉으로는 매끈하게 느껴진다.


출처: doopedia.co.kr

  은어는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며, 대부분의 민물고기에서 나는 비린내나 진흙 냄새가 나지 않고 오히려 수박향이 난다. 은어는 단백질과 칼슘, 철분이 풍부하여 떨어진 기력 회복에 도움을 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방에서 은어는 허한 기(氣)를 보하고 위(胃)를 튼튼하게 하며, 음(陰)을 길러주고 폐를 윤택하게 하여 기침을 멎게 하는 효능이 있는 약재로 사용되고 있다. 은어를 영어로 sweet fish라고 칭하는 걸 보면, 이 물고기에 대한 사랑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한결같다고 생각된다.

  은어는 또한 날렵하게 생긴 외모와 은백색의 깔끔한 빛깔로 다른 민물고기와 차별화되며, 강 밑바닥에 자갈이 깔려 있는 곳을 좋아한다. 주된 먹이는 돌에 붙은 조류이고, 오염된 하천에는 살지 못하고 1 급수의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 이러한 점에서 은어는 가히 민물고기의 귀족이라 할 수 있다.

  은어는 바다빙어과 물고기로서 연어처럼 바다에서 생활하다가 육지로 올라와서 알을 낳으며, 부화한 새끼들은 다시 바다로 내려가는 회유성 어종이다. 산란기인 9~10월이 되면 자기가 태어난 하천으로 거슬러 올라와 후손 번식을 위한 알을 낳으며, 알을 낳은 후에는 대부분 죽는다. 이처럼 은어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잊지 않으며, 그곳으로 돌아와서 생을 마감한다는 점에서 귀소본능(歸巢本能)이 투철한 물고기이다. 이 귀소성(歸巢性)에 의해 은어는 태어난 곳에서 가까운 해변으로 오게 되면 강물에 포함된 물질로 후각이 자극되고, 그 기억에 의하여 태어난 곳뿐만 아니라 부화지까지도 찾을 수가 있다.


출처: doopedia.co.kr

  태종실록에 의하면 임금이 예조에 명하기를, “사신이 장차 이를 것이니 각도로 하여금 수륙의 생산물을 연속하여 바치게 하고, 또 경기로 하여금 사신을 공궤(饋餉 : 음식을 줌)할 신선한 은구어를 연속하여 바치게 하라” 하였다고 하니, 은어가 외국의 귀빈을 접대하는 고급 요리에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의 이수광이 쓴 백과사전 격인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는 "은구어는 봄에 바다로부터 거슬러 올라와서, 여름과 가을까지 몸이 커졌다가 늦가을이면 거의 줄어든다.… 내가 순천에서 보니 깊은 겨울에도 역시 어쩌다가 이것이 있었다. 다만 겨울철 은어는 몸뚱이가 몹시 야위고 맛도 좋지 못했다"라고 기술한 것을 보면 당시에도 은어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을철이 되면 고향 영천강은 산란하러 올라오는 은어 떼들로 강바닥이 하얗게 물들곤 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강가에 투망이나 낚시를 들고 나와 은어들은 잡았고, 이런 날에는 80호 남짓한 고향마을은 은어 구울 때 나는 하얀 연기와 고소한 냄새로 뒤덮이곤 했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사실은 은어 낚시에는 미끼가 필요 없으며, 빈 낚시를 낚싯줄에 촘촘하게 묶은 다음, 강물 속에 던져 넣고 이리저리 훌치면 은어의 아가미나 지느러미가 낚시에 꿰여 올라오곤 했다. 그 정도로 당시엔 은어가 많았다.

  강물의 오염으로 인해 영천강에서 점차 물고기가 사라졌는데, 그중 제일 먼저 자취를 감춘 것이 은어였다. 맑은 물에서만 살 수 있는 은어의 속성상 이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향에서 은어가 자취를 감춘 후에도 그 맛과 고운 자태를 잊을 수 없어, 가끔 투망을 승용차에 싣고 경호강이나 섬진강으로 은어를 찾아 나섰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은어를 접한 것은 약 15년 전 남강댐 아래 사천만 방수로에서였다. 홍수철이 되어 남강댐 상류에 비가 많이 내려 수위가 높아지면 댐 관리소에서 사천만 방수로로 통하는 보조댐의 수문을 여는데, 이 때 진양호에 갇혀 있던 은어들이 하류로 내려간다. 댐 방류 때에는 급류가 흐르기 때문에 방수로에 사람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댐 수위가 낮아져서 보조댐 수문을 닫으면 이때가 은어를 잡을 수 있는 시기이다. 방수로는 인공적으로 만든 강이라 강바닥 곳곳에 웅덩이가 파여 있으며, 이 속에 은어와 민물뱀장어들이 숨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은어나 뱀장어를 잡기 위해서는 배터리를 이용해야 한다. 보통 오토바이용 배터리를 많이 쓰며, 배터리의 두 극을 전깃줄로 연결한 다음 고기들을 감전시켜 물고기를 잡곤 했다.

  지금도 그곳에 은어가 서식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며, 설사 은어가 있다 하더라도 배터리를 사용하여 물고기를 잡는 것은 불법이어서 이곳에서 은어를 잡는 것은 이젠 불가능하다.

  요즘 들어서는 은어가 귀하여 보기 힘들어져, 섬진강변에 위치한 민물고기 음식점의 수족관에서 가끔 은어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이나마 대부분이 내수면에서 양식한 은어이다 보니, 이젠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자유분방하게 뛰놀던 예전의 은어를 찾기란 어려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은어가 귀하다 보니 은어구이나 튀김 등 은어로 만든 음식도 먹기가 힘들게 되었다. 가끔 은어가 뛰노는 수족관을 지나칠 때면 은어 맛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나, 양식으로 기른 은어가 예전의 맛을 낼 리가 만무해 포기하고 만다. 이러다간 추억 속에 간신히 남아 있는 은어 맛을 완전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출처: doopedia.co.kr

  물질만능주의나 이기심, 도덕성 상실 등으로 인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자존심마저도 상실되어 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은어가 지니고 있는 고고하고 초연한 자세는 우리의 삶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준다.  뿐만 아니라, 각박하고 복잡한 도시에서의 삶으로 인해 고향에 대한 향수가 점차 사라지고, 정서가 메말라가는 현대인에게 은어의 귀소성은  신선하면서도 아련한 감동을 선사한다.

  은어는 또한 산란 후 미련 없이 생을 마감함으로써, 자식사랑에 대한 표상(表象) 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고 가족애가 상실된 현대 사회에서 은어의 이러한 아름다운 행동은 귀감이 될 만하다.

  흙탕물 속에서 살면서도 흙냄새를 풍기지 않고, 비린내 나는 물고기와 살면서도 비린내 풍기지 않으면서, 은백색의 도도한 자태를 유지하던 은어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진흙탕처럼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은어 그대를 내 인생의 멘토로 삼아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려고 생각했으나, 앞으로의 삶의 길잡이가 되어 주리라 기대했던 그대가 없는 현실을 슬퍼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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