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로 접어든 농촌 들녘은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간혹 꼬마 아이 너 댓 명이서 서릿발 선 논 가운데서 축구시합을 하고 있는 것 외에는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마을 입구, 집 안에서는 한 아낙네가 식구들의 점심을 위해 부엌에서 고구마를 썰어 말린 빼대기를 삶고 있고, 아래채 외양간에서는 비쩍 마른 누렁이가 거죽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은 채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이 맘 때면 농한기라 할 일이 없는 남정네들은 동네 입구 하꼬방이라 불리는 구멍가게 내실에 모여 노름판을 벌인다. 그날도 대여섯 명이 어두컴컴한 방에서 열심히 화투장을 쪼우고 있었다. 곁에는 한 되짜리 소주병 몇 개가 내용물이 모두 징발당한 채 널브러져 있고, 방 안에는 싸구려 담배가 타면서 내뿜는 매캐한 연기로 자욱했다. 멤버 중에는 약관 35세로 가장 나이가 어린 아끼오라는 사람도 끼여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왜 그 사람만 일본식 이름을 아직까지 사용하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었다.
오후 무렵 아끼오 부인이 남편을 찾아 하꼬방에 들렀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노름판에 끼여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이젠 차라리 체념한 듯 보였다. 남편이 술과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통에, 다른 사람의 논밭을 소작하여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삶이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하꼬방 주인에게 20원짜리 라면 3개를 주문한 후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섰다. 그녀가 마을 안 길로 들어서는데 남편인 아끼오가 따라오더니 두 사람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 여자가 어디서 그 비싼 라면을 함부로 사가지고 가는 거야?"
그들에게는 라면도 함부로 먹을 수 없는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나 보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자도 호락호락하지 않고 남편을 쳐다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대들었다.
"왜? 나는 라면 좀 먹으면 안 되나?"
알코올에 중독된 건지 판돈에 눈이 뒤집힌 건지,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로 여자를 째려보고 있던 아끼오의 오른손이 순간적으로 허공을 가르며 그녀의 따귀를 갈겼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아끼오의 친척 되는 사람이 우리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왔다.
"형님, 자전거 좀 빌려주이소"
"왜, 어디 가게?"
"아끼오 마누라가 파라티온 한 병을 마셨는데, 보건소 가서 의원 좀 모셔오게요"
독성이 너무 심해 생산이 중단된 맹독성 농약 파라티온! 아끼오 부인은 그 파라티온 한 병을 단숨에 다 들이켰던 것이다.
대나무 숲에 둘러 싸여 일 년 내내 음침한 기운이 감돌던 외딴집에서, 눈만 붙은 아들딸 세 명을 남겨두고 그녀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그날 밤은 숲 속의 두견새도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이틀 뒤, 숲 속의 외딴집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상여가 한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끼오는 그날도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게져 있었고, 상여 뒤에는 하얀 상복을 입고 한 손에는 유과를 든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조잘거렸다.
"우리 엄마 죽었어요, 상여 나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