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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4

by 찬란


입이 바싹 말랐지만 뭔가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한 번 마음을 정하니 이상하게도 머리가 차가워졌다.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지만, 내가 앞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물어 볼 수 없어. 나 혼자 판단하고 행동해야 해.“


그리고 그 판단과 행동의 무게를 알았기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먼저 소속 팀장에게 전화해야 했다. 퇴근 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소속 팀장에게 어제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속 팀장은 당황한 것 같았다. 당시에 진행 중이던 사내의 성추행 사건이 또 있었다며 요즘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다른 사건이 또 있는데, 요즘 무슨 일인지…”


그리고 가해자가 고위직급에 있기 때문에 그보다 더 상위 레벨에 메일로 신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상대방보다 윗 레벨선에 메일로 정식으로 보고를 해주면 좋겠어. 나는 참조로 넣어주고.”


그의 직급보다 상위 레벨은

인사실장과 CEO 뿐이었다.

메일을 썼다.

어제 있었던 일들의 간단한 나열,

현재 내 고통,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


절차대로 진행해 주시길, 그리고 회사 내 유포를 꼭 막아 주시길, 간곡히 부탁했다.

메일 송신 버튼을 눌렀다.

​​

잠시 후 인사실장에게 전화를 받았다.​ 가해자가 고위급이기 때문에 법무팀장이 직접 나의 케이스를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피해자의 커리어를 보호해 줄테니, 걱정 말아요.”

나의 커리어를 보호해 주겠다는 말에 순간 울컥했다.

인사실장은 당시 내 업무능력을 인정하고 있었고, 내가 정말 열심히 일한다는 것, 그리고 내 커리어를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회사의 온통 날고 기는 인재들이 모인 기획실에서, 그는 나에게 최상위 고과를 주었다. 그 잉크가 다 마르지도 않았던 시점이었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실감이 났다.

내가 그동안 소중히 쌓아올리던

나의 커리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곧 법무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가해자와 나 사이에 어제 있었던 일을 질의응답식으로 답했다. ​법무팀장은 차분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가 물었다.


“팀장님 아내분께서 그런 일을 당하면 어떠실 것 같으세요?”

내가 반문했다.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말자고 하겠죠.”

​“…제 남편도 그랬습니다.”


법무팀장은 전화를 마무리하며 나에게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제 명예를 걸고,

이 사건은 공정하고 정의롭게 처리하겠습니다.”

​​​

그 당시엔 몰랐지만, 이후 나는 법무팀장이 했던 그 말을 앞으로 여러 번 떠올리게 된다.

​​

아주 여러 번.

“Rock bottom became the solid foundation on which I rebuilt my life” - J.K.Rowling

시련은 바위처럼 내 인생을 단단하게 받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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