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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이차가해

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5

by 찬란


법무팀장과 통화를 마친 다음날이었다. ​그는 사건을 공정하고 정의롭게 해결하겠다고 나에게 약속했다.


여전히 마음은 천근 만근 무거웠지만,

주말이었다.

약속이 이미 잡혀 있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나랑도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던 동료였다. 우리는 같은 팀에서 근무했었다.

괴상한 상사 뒷담화, 업무를 함께 하며 느끼는 동지애,

이 인연을 바탕으로 가끔씩 차 한잔을 하거나 식사를 하며 웃고 떠들곤 했다.


“그 때 그 임원 때문에 우리 너무 힘들었잖아요.”

“어휴 맞아요, 저 밤 몇 번 샜잖아요. 과장님은 안한다고 도망가고.”

“하하, 죄송해요. 되게 옛날처럼 느껴져요. 얼마 안 되었는데.”


그는 가해자의 직속 부하였다.

하지만 그는 내가 잘 아는 선량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마음이 쎄했지만, 전화를 받기로 했다. 내가 전화를 받자, 그는 주저하며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두 분 다 내가 잘 아는 분들인데.. 허허.“

​​그는 말을 이었다.


“그분이..매우 힘들어하시고 있어요. 나에게도 심적으로 의지를 하고 있으시구요. 지금 가정적으로도 힘드시다고 하네요. 이혼당하실거 같다고 하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지금 가해자 대변해서 저한테 전화하셨어요?”

“아니 아니, 난 어느 쪽 편도 아니에요.”

“그럼 왜 전화하셨어요? 그사람이 원하는게 뭔데요?”

“선처를 해 주었으면 하세요. 그런데 본인이 연락을 직접 못하니까, 문제가 될 수도 있고… 그래서 나한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어요. 사실 나도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그분과의 마지막 의리로 그렇게 하기로 한거에요.”

​​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슴 속 무언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나랑 잘 알고 지내는 자신의 부하 직원에게 하소연을 가장해 사건을 유포하고, 나에게 연락해 선처를 종용하게 했다.

그는 나에게 교묘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 사건을 그냥 넘기지 않으면 내가 더 유포할 수도 있어.”


어쩌면 나에게 전화한 동료 또한 가해자에게 교묘하게 이용당한 피해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이를 판단하지 못하고 나에게 전화한 건 그의 큰 잘못이었다. 그는 그래서는 안 되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

“가해자의 입장을 듣고 나한테 선처해 달라고 대신 연락한 건가요? 엄연한 이차가해입니다. 회사에 추가 보고하겠습니다.”

“….미안해요, 알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켜는 손이 덜덜 떨렸다.​ 분노였는지, 괴로움이었는지, 두려움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법무팀과 경영지원팀에 메일을 썼다. 방금 받은 전화 내용을 공유했다.


“가해자가 부하 직원을 시켜 나에게 선처를 요구했고, 너무나 괴롭습니다. 분명 가해자와의 분리를 요청했는데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가해자의 입을 통해 회사에 이야기가 퍼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

몇 시간 후 법무팀장이 답장했다.

“가해자의 일방적인 행위이며 엄연한 이차가해이니 엄정히 조치했습니다. 당사자에게 구두 경고를 했습니다. ​곧 징계위원회를 개최할 것이며, 사장보고 예정입니다.”

그때만 해도 징계위원회가 끝나고 다시 가해자와 보는 일이 없어지게 되면 곧 일상을 회복할 거라 믿었다.


“회사를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일은 곧 해결 될 거야.”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노트북을 켜자마자,

나의 메신저 불이

반짝반짝 거리기 시작했다.

“Although the world is full of suffering, it is also full of the overcoming of it.” -Helen Keller

세상은 시련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극복으로 가득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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