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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입사시험 출제자의 하루

딱히 별 건 없었고, 지금도 별 건 아니게 되었지만

by 찬란



12년 전, 앳된 사원이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인사팀에서 호출이 왔다.

“입사시험 출제위원 TF로 한 달 파견 좀 나가줘요. 전 계열사에서 모여 숙식하게 될 거예요.”

헉. 그 말인즉슨, 내 입사 시험 성적이 상당히 좋았다는 얘기 아닌가. 어깨뽕이 솟았다. 주변에 자랑도 실컷 하고, 캐리어를 신나게 챙겨 TF 장소로 향했다.

전 계열사에서 선발된 23명의 젊은 사원들이 모여 있었다. 마치 《헌터X헌터》 같은 묘한 서바이벌 분위기였다. 그리고 나는,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이상한 투지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앉았다. 이게 뭐라고? 지금 생각하면 웃기고 부끄럽다. 하지만 그 때 난 참 오만방자했고, 소년만화의 주인공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핸드폰은 전부 반납했다. 2인1실로 방이 배정되었고 한 데 모여 각자 인사를 나눴다. 전자, 배터리, 화학, 물산, 면세점.. 다른 배경을 가진 다양한 동기들이 모였다. 젊은 남녀들이 모이면 그렇듯 묘한 호감과 우정이 혼재한 채 서로 금방 하하호호 친해지게 되었다.


우리는 언어·수리 문제를 미리 풀고 검토했고, 상식 문제를 직접 만들었다. 서로 문제를 평가하고, 수정하고, 오탈자를 찾았다. 한 달간 진짜 진지하게 시험 문제만 들여다봤다.


“다음 경제학자 중 시카고 학파로 신자유주의를 제창한 사람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유래된, 뛰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이론의 이름은?”

마지막 3일은 인쇄소까지 따라가 문제를 검수했다. 전국 단위로 진행되는 시험이었다. 막판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흘렀다. 다들 카페인 음료를 들이켜며 밤을 새웠다. 오탈자를 잘 찾아내던 동기는 삼일 밤낮을 지새웠다. 미안스럽게도, 나는 꼬박꼬박 8시간씩 잤다.

(“아 나 졸려서 안 되겠어… 좀 자고 올게요…”)

그렇게 꽤나 힘들었지만, 뭔가 중요한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함께 고생한 동기들과도 끈끈해졌다. 그중 몇 명과는 나중에 밴드도 결성해 공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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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전략기획부문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다 사고를 당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 용기, 희망을 믿습니다. chanranfromyo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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