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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의전을 위해, 중국 술에 물을 탔다.

영업팀에 전설의 물술 제조 기술자가 있었다.

by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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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고객행사 맡아 진행해 봐. 중국 출장 준비해.”



중국은 회사 매출의 칠할을 차지하는 큰 시장이었다. 우리를 먹여 살린다고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생산한 제품 대부분은 항구에서 배에 실린 후 중국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중국 고객들의 원료창고로 배달되었다.


고객들은 중국 각지에서 큰 규모의 사업을 운영하는 찐 부자들이었다. 말하자면 중국의 부호들이었고 중요한 고객이었다. 그들을 접대하는 것은 영업인으로서의 여러 업무 중 하나였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주니어 영업사원들은 거래선의 소소한 접대에 자주 동원되곤 했다.


“레몬 대리, 그 쒀통 사장님이 저번에 한국에서 받으신 건강검진결과 좀 다시 보내줄 수 있어?”

“파인애플 과장, 이번에 워호우 전무님이 한국 오실 건데 운전 좀 해 줘야겠다.“

“자두 차장, 쩡터우 회장님이 한국 국제학교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는 데 좀 아는 거 있어?“


나는 어린 쪼랩 사원이었으므로 중국 고객사의 실무진과 주로 소통했다. 일상적인 거래, 물건 수송 일정 논의, 클레임 처리 같은 일들이었다. 지점장, 중국법인장 정도가 되면 고객사 임원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주기적으로 만나 신제품을 소개하고 장기계약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사장 정도가 되면, 한 번씩 중국으로 출장가 고객사 사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골프도 치고, 술도 마셨다. 그 옆에서는 지점장과 법인장이 통역을 담당했다.


일년에 한 번, 주요 고객들을 초청해 기술세미나와 만찬을 여는 대규모 행사가 있었다. 중국의 모든 주요 거래선을 한 데 모아 부스를 차려 기술 세미나를 연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는 호텔에서 식사하며 공연을 즐긴다. 꽤 큰 업무였다. 나는 중국어를 한다는 이유로 그 업무를 맡았다.


“이 업무는 경험이 중요하니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 낫지.”


그렇게 일 년 더 일 년 더..

꽤 오랫동안 그 업무를 하게 되었다.


수백 명이 참석하는 고객 만찬이었다. 호텔 예약부터 좌석배치, 메뉴, 꽃, 공연까지 세세한 전략이 필요했다. 무엇 하나 소홀히 준비할 수 없었다. 결혼식을 아주 아주 공들여 준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고객들이 한 명 한 명 수백억을 움직이는 분들이고, 무대를 설치해 온갖 공연들을 올리는 것 정도가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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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고객행사를 열 장소 선정의 건입니다. 쉐라톤, 메리어트, 웨스틴 호텔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각자 입지, 주차, 연회장 규모 등을 비교해보면...“


하지만 묘한 건,

이 행사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진짜 ‘평가자’는 고객이 아니라 ‘내부 고객들’, 우리 회사의 경영진이라는 데 있었다. 행사 주최자로서, 사실 고객 만족보다 더 신경 쓰인 건 행사 완료 후 CEO의 한마디였다. 해외 고객들을 위한 자리였지만, 평가하는 건 우리 회사의 경영진이었다.


한 해는 당시 CEO의 행사 직후 했던 말 한마디로 모든 실무진을 좌절에 빠뜨린 적도 있었다.


“중국 음식은… 원래 이런가?”


돌아오는 비행기 안은 내내 침울했다.


D-Day,

행사 당일이 되면, 준비한 실무진들의 긴장이 극에 달한다. 다같이 베이스캠프인 스위트룸에 아침부터 모여 브리핑을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배차 담당자는 차를 보내 임원들을 픽업하고, 행사 담당자는 호텔, 행사진행업체와 마지막 점검을 한다.


“파인애플 대리님, 무대 배너 디자인 좀 봐주세요.”

“파인애플, 공연할 변검 팀이 리허설 하고 싶다는데.”

“파인애플 대리, VIP 대기실 세팅은 어떻게 되고 있지?”


며칠 간은 눈이 팽 팽 돌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영화 속에서처럼 멋진 커리어우먼을 상상하시는지? 귀에 무전기를 꽂고 고상하게 하이힐을 신은 채로 디자인 결정만 척척.

사실은 계속해서 뛰어다니느라 꼬질꼬질 운동화에, 여기 저기 불려 다니는 사람이 나였다. 펑 펑 터지는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전화기를 붙잡고 땀을 뻘뻘 흘리는 게 내 진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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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시간이 되면 드디어 수백여명이 다같이 한 자리에 모인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으면, CEO는 20개 넘는 테이블을 인사차 빙 돌았다. 고객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인사한다. 옆에서 중국법인장이 통역을 맡아 소개를 한다. 고객과 웃고, 잔을 채운다. 중국 백주로 다같이 건배를 하고 원샷 후 다음 테이블로 옮긴다.


모든 테이블에서 ‘건배!’ 후 원샷이다.

그렇게 계속 중국 백주를 마시다간 사고가 난다.


사장님이 너무 만취하시면 곤란하므로, 사장님 전용 물술을 만드는 것이 업무 중 하나였다. (!!)


행사 준비를 위해 빌린 스위트룸에서 실무자들이 한 참 고생할 때, 우리는 하루 정도 다같이 모였다.


비싼 중국 백주를 한 병 비우고,

유명한 전담 ‘기술자’가 교묘한 솜씨로 몰래 물을 채워 넣었다.

(중국 백주는 마개 구조가 복잡해서 물을 넣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했다.)


"자 기술자 와 봐, 술병에 물을 채워넣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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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사실 사장님을 핑계 삼아 실무자들이 좋은 술 한 병 비운 셈이다.

그럼에도 그때는 경영진을 위한 의전이 ‘능력’이라 여겨졌고, 누구보다 꼼꼼히 준비했다. 임원들 도착부터 귀국까지 스케줄은 분 단위로 짰고, 공항 픽업도, 호텔 체크인도 우리가 맡았다. 렌트카 열 대를 운영해야 했다. 대부분의 임원들은 중국어를 못했다. 그러니 임원별 차량에 기사와 함께 태울 “중국어 가능한 선탑자“도 선별했다. 주로 중국어 가능한 주니어 사원들이었다. 차량별 스케줄은 분 단위로 운영되었다.


“의전도 실력이다.”


그 말은 한동안 진리였다. 아직까지도 이 말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예전에 비해 그 중요성은 확실히 떨어졌다고 느낀다.


이제 경영진들은 실무자들이 들고 오는 메시지와 논리에 좀 더 집중한다. 그것을 어느 그릇에 담아오는지, 담아올 때 얼마나 허리를 굽히고 있는지는 덜 따지고 있다. 그것이 시대의 흐름에도 맞다.


그래서 이제는 ‘물술 기술자’는 없다.

시대가 바뀌었고, 그것을 그리워 할 이유도 없다. 의전보다 본질이 중요해졌다. ‘의전’에 쏟을 인력과 지원은, 분명 다른 곳에 쓰인다면 더 생산적으로 꽃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남았다.


“임원 돼 봐, 사람들이 90도로 인사하면 얼마나 짜릿한데.”


그게 사람 마음이고 불편한 진실이다.

사실 아무도 좋아한다고 말은 못하지만,

대접받는 걸 싫어할 사람도 없다.


하지만, 결코 잊으면 안 되는 한 가지.

눈치 보느라 중요한 말을 전달받지 못한다면,

결국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


예전 회사에 새로 부임한 CEO가 이렇게 말했다.

“의전 그만하고, 회사 앞날이나 걱정해.”


그 말이 의전 중시 그 자체였던 회사를 꽤 많이 바꿨다. 최고경영자가 그렇게 말하고, 의전으로 꽤나 유명했던 임원 한 명이 연말에 집으로 갔다. 회사 분위기는 꽤 술렁였다.

나도 매일 매일 나이를 먹고 있지만, 그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고, 앞으로도 기억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분은 성공의 아이콘이 되어 지금도 뉴스에 자주 등장 중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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