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실무자들이 싸우고, 임원들이 조율하기도
“거 곤란하네, 왜 기획실은 한 쪽 사업부 편만 들지?”
“그건 절대 아닙니다, 사업부장님…”
회사에 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싸움을 본다. 사람들은 말로, 그리고 글로 싸운다. 직급도 성별도 상관없다. 단발성으로 화르륵 타오르고 재만 남는 싸움도 있지만, 수 년을 이어가는 군자들의 은은한 싸움도 있다.
그 중 나에게 가장 난감한 싸움은 사업부 간 갈등이었다. 높은 임원들도 부하직원들 못지 않게 싸운다. 실무자만큼 티를 내지 않을 뿐이다.
세 개의 주요 사업부가 있었다. 생산공장의 공정 단계에 따라 구분된 세 개의 조직이었다. 당연히도 각 제품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앞단에서 생산해야 뒷단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석유화학 공정이 복잡해 사과, 사과잼, 애플파이 사업부로 바꾸었습니다.)
‘사과’ 사업부에서는 사과를 따 사과박스에 잘 담아 팔아낸 뒤, 일부를 ‘사과잼’ 사업부의 원료로 넘겼다. 사과잼 사업부는 유리병에 담은 사과잼을 팔고, 또 남은 잼을 ‘애플파이’ 사업부에 넘긴다. ‘애플파이’ 사업부는 비닐봉지에 담은 애플파이를 팔아 매출을 올린다. 당시 돈을 버는 게 어느 제품이냐에 따라, 생산하는 제품 비율은 실시간으로 조정되었다.
“이번 달은 더워서 다들 애플파이를 안 사먹습니다. 오히려 빙수에 넣을 사과잼 매출이 좋으니 사과잼 공장 가동률을 올려야 합니다.”
“어허 무슨 말이죠? 애플파이 거래선과의 계약물량이 있습니다. 애플파이 공장 가동률을 줄일 순 없어요!”
세 개의 사업부 임원들은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했다. 각 사업부의 사업부장들은 골프도 함께 치고,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 사장 앞에서의 회의에서도 서로를 감싸주며 허허허 웃음꽃을 피웠다. 사회생활의 고수들 답게, 절대로 공적인 자리에서 서로를 폄훼하고 험담하지 않았다.
“사과 공장에서 사고가 나서 가동정지되었던데, 사과전무님. 공장 재가동 시키시느라 고생하셨죠?”
“말도 마십시오, 사과잼 상무님. 사과잼 공장에 사과 공급 차질을 빚게 해드려 미안했습니다. 허허...”
그러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수면 아래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 신경전의 한복판에,
나는 전사기획팀 소속으로 있었다.
매달 각 공장의 가동률을 조정하는 회의가 있었다. 많은 이해관계가 걸려있었다. 수입한 원재료, 공장별 판매 계약, 수익률 등... 이 복잡하게 얽힌 요소를 고려해 각 사업부 내 공장의 가동을 정해야 했다.
그 회의를 주최하고 조율하는 일이 내 몫이었다.
처음엔 꽤 괴로웠다. 각자 자기 얘기만 하고,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야 공장 가동지침이 정해지는데, 매번 싸움으로 시작해 싸움으로 끝났다.
(애플파이 전무)
“잼이 없으면 파이를 만들수가 없어요! 거래선들이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사과잼 상무)
“사과 공급이 늦어지는걸 어쩝니까? 어차피 이번달은 애플파이가 적자라고 하던데, 애플파이 공장을 아예 끄시죠?”
(나)
“저, 그.. 두 분 다 자중하시고, 논의를 해보시죠.”
(나를 뺀 모두)
“(동시에) 자중??? 기획팀이나 자중하세욧!”
싸움에 휘둘리다 보면 결정되는 것은 없고 서로 맘만 상해가곤 했다. 괜히 불똥이 나에게 튀어 오기도 했다. 공장 가동율은 사업부장의 매출실적과 직결되니 그들이 예민한 게 당연하기도 했다.
그래서 전략을 세웠다. 싸움을 줄이고, 결정은 효율적으로 끌어내기 위한 3단계. “임원들이 싸우기 전에 실무자 선에서 미리 조율해 놓자”는 것이었다. 실무자들끼리 얘기가 얼추 되어있으면, 임원들의 기싸움을 줄일 수 있을 것이었다.
표면적인 직급과 실제 권한은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매번 이슈가 생길 때마다, 진짜 결정을 쥐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사업부 기획팀장, 영업 헤드, 또는 공장장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키맨’은, 매 번 상황에 따라 바뀌었다. 매 달 논의해야할 안건의 시작점은 달랐기 때문이다.
논리로 움직이는 이도 있었다.
“사과잼을 파는 게 지금은 훨씬 이익이에요, 이번엔 애플파이사업부에서 양보해 주십시오.”
‘신세졌다’는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
“사과를 다른 곳에서 사서라도 공급해주시면, 저희가 크게 신세졌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수동적인 사람도 있다.
“지난 달에 이미 동의하신 사항입니다. 이번엔 사과잼사업부에서 양해해 주세요.”
그 사람의 욕망과 우선순위를 이해해야 했다.
어떤 의견이 수렴되었고, 어떻게 조율되었는지를 메일로 보기 좋게 정리해 전체에 공유했다. 고생한 팀, 담당자가 있다면 감사의 말을 빼먹지 않았다.
“사과잼 사업부 김애플 차장님이 옆 회사 사과잼을 얻어오셨습니다. 애플파이 생산에 차질이 없을 겁니다. 신속한 대응에 감사드립니다.”
메일에는 반드시 각 사업부장을 참조로 넣었다. 고생한 김애플 차장님이 상관인 사과잼상무님 앞에서 기분 좀 내실 수 있도록.
그들도 그들의 상관에게 보고할 말이 있어야 했다.
몇 달이 지나자 회의 분위기가 조금씩 유연해졌다. 중간에서 열심히 중재하자, 각 사업부도 의견을 조정해 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모두 격앙되어 있다가도, 중간에 중재자가 끼면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싸움이 줄어들고, 의사결정의 속도도 붙었다.
그 때 알았다.
조직은 사람이 만들고, 조율도 결국 사람이 한다는 것을. 그리고 실무자는 그런 ‘사람 사이’를 걷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보면 자네는 사회를 참 잘 보는 거 같아.”
하지만 그 모든 조율과 노력이
결국 불황을 이기진 못했다.
아무리 수영을 잘 해도
거대한 파도엔 떠내려가기 마련이니까.
'실무자끼리 미리 쇼부보는 전략’은 고군분투하던 제가 당시 시도했던 조율의 여러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이 전략은 대부분의 경우 효과가 있었지만...어떤 경우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때가 있었음을 미리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