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그만둘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갑자기 전사 기획팀으로 발령났다.
처음엔 사업부 산하의 작은 기획팀에서 일했다. 이후 현장을 알아야 제대로 된 기획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원해서 영업 현장으로 옮겼다. 엑셀과 피피티만 다루던 나는 새로운 세계에 철푸덕 떨어졌다. 처음 겪는 영업 용어, 용선과 각종 수출업무, 통관과 마감 등에 허덕인 지 1년이 지났다.
대기업 부사장이 직접 내 자리에 와서 자료 작성을 부탁했다.
“그룹 보고를 해야 하는데, 자네가 좀 도와줄 수 있나?”
그 일은 사내에 금세 퍼졌다. 동기들이 나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너 상당히 열심히 했었나 보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모두가 나를 멋지다고 말해주지는 않았다. 당시 내 소속팀장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럴 만도 했다. 타 사업부의 임원이 자신의 팀원을 찾아와, 팀장인 자신을 패싱해 업무를 지시한 셈이었다. 패싱 당한 팀장 입장에서는 썩 기분 좋을 일은 아니었다. 그는 유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아직 자네가 우리 사업부에서 그 정돈 아닌데…?“
“......”
(네. 알아요. 제가 사고나 치는 초보 영업러인거. 어제도 배 놓쳐서 난리난 거.)
후배 중 한 명은 나에게 날카로운 말투로 나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부사장님까지 되어서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
(그러면 안 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일단 머리를 긁적이기로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떫은 표정으로 나에게 공치사를 하곤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리곤 했다. 쩝.
대부분 일들이 그렇듯 이 일은 며칠 호사가들의 안주가 되곤 사람들에게서 모두 잊혀졌다. 나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매일 혼나는 초보 영업러 생활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속사업부의 임원이 나를 호출했다. 나보고 임원실에 들어오라고 했다.
“그..자네가 전사 기획팀에 가야 할 것 같아.”
청천벽력이었다. 어렵게 영업 현장에 와서 막 적응하기 시작했는데?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지만,
대기업에서 전배는 협의 사항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전사기획팀을 가려면 두 개 층을 더 올라가야 했다. 발령은 신속하게 공지되었고, 나는 노트북을 들고 올라가 새로운 팀에 인사를 드렸다. 눈을 꿈벅이며 그간 얼굴만 알고 지내던 기획 팀장과 팀원들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잘 부탁해야지. 이 자리 직접 우리가 닦아놨다구. 여기 앉아.”
막상 들어와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팀 분위기가 좋았다. 워낙 업무량이 많다 보니 팀원들간의 관계는 무척 끈끈한 편이었고, 무척 협조적이었다. 모두 나의 적응을 도와주며 모르는 걸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오히려 업무량 적은 팀에서 통상 벌어지는 ‘사내 정치와 뒷담화, 편가르기’는 없어서 후련했다. 팀 안에서는 각자의 업무 분장도 확실했다.
기왕 온 거, 또 미친 듯이 일했다.
엑셀 하나, 그래프 하나에도 내 관점과 메시지를 녹여 넣었다. 결론이 정해진 보고서라도 내 언어로 다시 재구성했다. 표 하나, 단어 하나 모두 일관성 있게 의미를 담아 사용했다.
그걸 알아보는 사람은, 결국 알아봤다.
“보고서 퀄리티가 나쁘지 않네.”
기획팀 팀원들은 그 한마디를 위해 시간과 열정을 갈아넣었다. 경영진들은 수시로 왔다갔다 하며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그래서 팀원들은 매일 초긴장 상태였다.
숨 쉴 틈 없이 일 년이 흘렀다.
요청받은 수많은 보고서를 쏟아냈다. 경영진들이 보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했으므로 쉽게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보고 기한은 언제나 빠듯했고 요구하는 내용 범위는 엄청났다. 거의 일주일에 책 한 권씩 편찬하는 느낌이었다.
매번 보고할 때마다 보고 받은 이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질문들을 대비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어떤 질문이 나올 지 모르기 때문에 예상되는 모든 질문 리스트를 뽑아 백데이터를 준비하고 숙지해야 했다. 그 보고 과정에서 나온 협의, 질문들은 다음 보고 주제가 되곤 했다.
솔직히 ‘이 사람들이 날 시험하나?’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승부욕이 생겼다.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최선 이상으로 해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키지도 않은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나도 그 과중했던 업무 중 정신 나갔었지 싶다. 그 때의 난, 그렇게도 인정 받고 칭찬 받고 싶었다.)
“석유화학 사이클이 끝나간다. 이제는 재활용 사업을 키워야 한다.”
관련 사업부, 연구소, 공장, 직접 뛰었다.
틀을 짜고, 내용을 채우고, 전략을 그렸다.
그 보고서는 결국 CEO에게까지 전달되었다.
몇 달 뒤, 팀장이 조용히 내 자리에 와 말했다.
“다음 달부터 자네가 그룹 최고위층에 보고할 자료를 총괄하게 될 거야.
우리 회사의 현재와 미래를 다루는 아주 중요한 작업이야.”
이따금 전에 몸 담았던 사업부에 들르면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낯설고 조심스러운 눈빛.
그게 좋았다.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 회사를 떠난 입장에서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입맛이 씁쓸해진다.
죽어라 일했고, 잠시나마 인정도 받았지만
결국 나는 상사의 성추행으로 회사를 나왔다.
더 거칠게 말하자면,
결국 그 짧았던 ‘인정 받는 시간’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고,
내 직장 생활은 퇴사와 함께 끝났다.
내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 없이도 회사는 아주 잘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그토록 그 당시에 뜨겁게 쏟아부었던 나의 열정은,
결국 조직 안에서는 어떤 의미였을까.
내 인생에서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렇게 열심히 일 했던 것이, 아무 의미 없는 걸까?”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나 자신에게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따뜻하게 스스로를 격려하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그 때 기분 좋았던 순간이 있었으니, 그걸로 되었어.”
‘건조한 냉소주의자인 나’는 이렇게 말했다.
“별 의미 없지, 결국 다 헛수고였어.”
둘 다,
왠지 정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믿고 있다.
그 때 내가 쏟아부었던 노력, 치열한 고민과 몰입의 시간이 지금 내 삶의 내공 중 한 층을 만들어주었으리라.
“그 때 열심히 했기 때문에, 후회 한 조각 남기지 않았어.
할 수 있는 만큼 해 봤으니까.”
그래서 아직도,
열심히 일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믿어 본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 시간은
나의 안 어디에선가 살아 남아있고,
힘든 날이 왔을 때, 반드시 나를 도와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