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붐>을 보지 않아도 노래, 소피 마르소, 그리고 남자 주인공이 소피마르소에게 헤드셋을 씌어주는 장면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끄러운 클럽 음악과 여러 사람의 웅성 거리는 소리가 섞인 소음에서 갑자기 ‘Dreams ~’가 흘러 나오는 그 장면 말이다. 분명 많은 사람과 혼잡스러운 공간에 있는데 노래 하나에 바로 둘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그 장면.
고등학생 시절, 난 노래를 멀리 하려 했다. 하여 pmp에는 언제나 신승범 인강만이 있을 뿐이었다. 노래를 들으면 공부가 되지 않는데 언제나 노래가 듣고 싶었던 탓이다. 노래는 매번 나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난 기꺼이 따라 갔고. 꼭 멋있는 남자 주인공이 내게 헤드셋을 씌어주며 로맨틱한 노래를 들려주지 않더라도, 내가 내 손으로 듣고 싶은 노래를 골라서 이어폰을 꼽으면 어딘가로 도망칠 수 있었다. 불굴의 의지로 노래를 듣지 않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맘을 다 잡아도, 참을 수 없는 때가 오긴 왔다. 어딘가로 도망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 같을 때가 종종. 그럴 때마다 한 친구에게 갔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유독 많이 들어 있는 pmp의 소유자에게.
“ 나 pmp 좀 빌려 줄수 있어? ”
듣고 싶은 노래를 고민고민하다 하나 선택해서 곡이 끝날 때까지 멍 때렸다. 말 그대로 ‘멍’. 그리곤 노래에 몰입했다. 가끔은 가사에, 가끔은 리듬에. 문제집의 한 글자를 찍고 그 글자만 바라봤다. 분명 야간자율학습 중인 교실에 앉아 있었지만, 앉아있지 않았다. 노래가 어떤 특정하고 구체적인 공간으로 보내준 것은 아니다. 갑자기 에펠탑 앞 같다던지, 한강공원 같다던지, 하다 못해 집에 온 것 같다던지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 상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어딘가인데 나만의 공간이었다. 일종의 도피처였다. 가성비가 좋은 일탈이었다. <라라랜드>에서 두 주인공이 춤을 추다가 갑자기 하늘을 날며 새로운 공간이 펼쳐지는 장면이 있다. 누가봐도 cg로 작업한, 현실에는 없는 공간. 빛이 가득한 게 우주 같기도 하고, 안개가 가득한 게 이제껏 보지 못한 높은 하늘 같기도 한. 음악을 들을 때 마다, 그런 비슷한 공간으로 가는 것 같았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노래를 듣는 지에 따라, 안개의 정도나 빛의 세기, 색깔 같은 건 달라졌지만. 난 그 곳에서 느릿느릿 걷거나, 숨이 차게 뛰거나, 고개를 괴며 앉아있거나, 한껏 웅크려 누워있었다. 신나는 노래를 들으면 때때로 춤도 췄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노래를 들으려 하지 않는 의지 같은 건 필요가 없어졌다. 그 덕에 더욱 더 나만의 공간으로 도피하기 위해 빈번히 노래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새어 나오는 마음을 누구에게도 전하지는 못하겠어서 홀로 흩날리며 정처 없이 걷는 거리에서도, 누가 툭 치기만 해도 짜증이 솟는 출퇴근 길 지옥철에서도, 오늘은 반드시 뭐라도 끄적여서 잡념을 털어낸다는 일념 하에 온 카페에서도, 유난히 내일이 오는 게 싫어서 잠에 들지 못하는 침대에서도. 내 인생에 크고 작게 환멸이 날 때, 그렇다고 정말 훌쩍 떠나버릴 수는 없을 때 말이다.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만의 공간으로 도피하기에는 여의치가 않을 때, 핸드폰을 들어 신중히 들을 노래를 고민해 보는 것이다. 어떤 노래를 듣는냐에 따라 갈 수 있는 공간의 빛의 색이나 세기, 안개의 정도가 달라지니,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라붐>에서 두 남녀를 그들만의 공간을 보내준 노래에 ‘ i try to live in dreams’ 란 가삿말이 나온다. 내가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는 공간도 꿈 같은 곳일 지도 모르겠다. 난 그 꿈 같은 공간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가능한 아무도 몰래. 현실에 계속 발 붙이고 살기 위해서 말이다.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꿈 같은 공간에서의 순간순간이 필요한 것이다. 짧으면 3분, 길면 5분 남짓한 시간이. 그 곳에 다시 가서 들숨에 숨을 들이쉬고 날숨에 숨을 내쉬기 위해서. 그게 내가 노래를 듣는 이유다. 꿈 같은 공간을 주기적으로 들러야 하는 이유다.
물론 그래도 가끔은
Dreams are my re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