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g Feb 12. 2018

너의이름은 : #망각저항 #타자되기 #동일본대지진


인연을 상징하는 빨간 끈으로 이어진 두 고등학생은 일주일에 두세차례 서로의 몸이 뒤바뀐다. 처음에는 꿈인줄 알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이 믿기지 않은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임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1200년마다 한번씩 있는 혜성충돌이 있는 날 이후. 그 신기한 경험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꿈을 꾼 듯 잃어가는 기억을 찾기 위해 남고생 타키는 망각에 저항하며 그녀를 찾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증명할 수 없는 기억은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모든것을 포기하려는 순간 비로소 그 마을이 3년전 과거에 존재했던 마을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만약 내가 너라면. 그리고 너가 만약 나라면. 조금 유치할 수 있지만 영화 <너의 이름은> 이러한 '타자되기'의 모티브에서 시작한다. 이미 체인지(1997)나 스위치(1991)와 같은 코미디 영화에서 보아왔던 설정으로, <너의 이름은> 역시 시골에서 사는 여고생과 도쿄에 사는 남고생의 몸이 서로 바뀌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전반부에 배치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타자되기'의 모티브는 단순 설정에서 멈추지 않는다. 더 이상 서로의 몸이 바뀌지 않게 되는 순간, 비로서 영화는 더욱 몰입도를 높여가며 '타자되기'의 의미를 확장해 낸다.




미츠하가 살던 마을이 3년 전 그날. 혜성 충돌로 인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된 타키는 다시 한번 그녀의 몸속에 들어가게 된다. 영화 후반부는 비극적인 혜성충돌을 막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타키와 미츠하의 이야기에 방점이 찍힌다. 비극의 원인은 다르지만, 마을이 불타오르고 수많은 망자를 만들어 낸 사건은 일본 관객들로 하여금 동일본 대지진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킨다. 가까운 이웃들의 비극을 바라봐야만 했기에 만들어진 암울한 사회적 상흔. 그렇기에 이 영화의 <타자되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음 사람들이 되어 보는 것. 과거로 돌아가 그떄의 사건을 막으려 노력하는 것. 망각과 싸우며 목숨을 다해 비극을 막으려는 타키는 현재 일본인들의 대리인이며, 미츠하는 그들이 지켜내고 싶은 과거의 이웃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무스비>의 끈으로 이어져있다.




'매듭' 혹은 '잇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무스비는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상징이다. 끈의 이미지로서 과학적 설명없이 일어나는 타키와 미츠하의 변화의 유일한 설명이기도 하며, 망각에 저항하며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를 만나기 위해 떠난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무스비'는 영화의 전반부에서 둘 간의 인연을 상징하며 물리적 변화 이유를 해소하는 매개로 사용된다. 하지만 후반부 이야기 구조에 일본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지면서 '무스비'는 현 시대를 통찰하는 매개로 사용된 것이다.


<너의 이름은>은 일본 영화사에 기록될 만한 흥행을 기록중이다. 작년 한해 일본 내에서 1,500만명의 관객과 2,000억이 넘은 수익을 이뤄냈다. 그리고 이러한 신드롬의 기저에는 이러한 신카이 마토코만의 세상보기 방식이 존재했던 것이다. 절망적인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타자되기를 통해 사회적 희망을 이어나가는 것. 20년의 경기침체에 더해 연이은 자연재해로 인해 희망을 잃어버린 일본인들에게 신카이 마토코는 희망을 말한다. 특히 미야카지 하야오의 은퇴 번복을 할 정도로 시대적 어른이 부족한 일본 영화계에서 신카이 마토코의 등장은 단비같은 존재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경계는 일본 열도에서만 한정되지 않는다. 한국관객에게도 <너의 이름은>은 특별한 의미를 지진다. 특히나 마츠하의 아버지가 '폭파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가만히 있으라' 방송하는 장면은 한국의 특수성과 더해져 가슴의 울림을 만든다. 영화 속 타키는 그들의 대리인이자, 우리의 대리인이기도 하다.




단순한 시간여행을 넘어 <너의 이름은>은 과거와 현재를 명명하고 이어주는 영화다. 비극적 아픔에 함몰되지 않고, 그 절망 한가운데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한줄기 촛불을 이어나간다. 그것을 우리는 희망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 희망하기는 결코 한 개인에 의해 이뤄지는 개별적 사건은 아니다. 타자와의 끈임없는 관계와 망 속에서 이뤄지는 사회적 사건이 동반되고 선제되어야 한다. 동시대의 타자들뿐 아니라, 역사속 절망과 과거의 이웃까지도 품는 신카이 마토코의 작법은 2017년 새해 희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전한다. 새해 우리는 타자의 안녕을 희망하는가? 희망하기를 꿈꾸는가? 우리는 얼마나 망각과 저항하고 있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공범자들 : '눈물나게 재미있는' 공영방송 잔혹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