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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 Dec 22. 2022

시간을 채우지 않고 비워둘 것에 대한 허락

더 이상 보지 않는 낡은 책들을 분야별로 분류해서 당근에 나눔으로 올렸다. 연락이 쉬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띠링띠링 바로 알람이 울렸다. 경영/경제 분야의 알람이었다.


매너온도 56.9도의 따뜻한 이웃씨는 지금 당장 갈테니 본인에게 나눔을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물었다.


"한 권을 빠트리고 올렸는데 이것도 가져가실래요?" <마흔살, 행복한 부자아빠>라는 책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올리신 다른 책들도 제가 받을 수 있을까요?자기계발 서적이요."


"네, 그러세요."


버리기 아까워 이고있던 13권의 책을 누군가 기꺼이 가져다 읽어주겠다니, 그것도 이렇게 빨리 눈 앞에서 치워주겠다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때 그인지 그녀일지 모를 사람이 한 마디 덧붙였다.


"얼마전에 퇴사하고 집에서 하루종일 책만 보고 있거든요. 정말 감사합니다."


당근으로 거래를 하다보면 종종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예물 가방을 사갔던 이웃은 본인이 유산만 몇 번째라 우울한데 무언가 사면 기분이 나아질까 해서 이걸 산다고 했다. 이번엔 잘 될 거라고 굳게 믿었지만 또다시 아이를 잃은 그녀는 본인의 사연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생판 남인 나에게 이야기 했다. 왜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건지 곰곰 생각하다가 마음대로 상상해버린 그녀의 속마음은'그  분별 일이 아니긴 한데 지금 누구에게든 이야기 하지 않으면 내 답답한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아요.' 였다.


이 56.9도의 따뜻한 이웃씨가 본인의 사연을 설명하는 메시지에서도 왜인지 모르게 그 비슷한 속마음이 느껴졌다.


30분이 채 되지 않아 벨이 울렸다. 지하주차장이 아닌 1층 현관으로 온 걸 보니 그 눈길을 걸어왔는 모양이다. 50대가 이제 막 되었을까 싶은 머리가 조금 벗겨진 아저씨가 서있었다. 아직 은퇴하기엔 조금 이른 나이이고, 집에서 하루종일 책만 본다니 새로운 계획이 있는 퇴사도 아닌듯하다. 그렇다면 이 아저씨는 어찌됐건 잠시 쉬기로 했다는 건데 그의 메시지에 담겨있던 '하루종일', '집에서', '책만', 'ㅠ' 같은 표현들 이렇게 해석됐다.


'퇴사하고 갑자기 찾아온 텅 빈 일상을 뭘로 채울 지 모르겠어서... 아내는 그동안 고생했으니 좀 쉬라는데 마냥 쉬기만 하면 한심해 보일듯하여 무작정 책이라도 읽어보고 있습니다.'


그의 진짜 사정이 무언지 나는 알 수 없다. 알고보면 투자에 성공해 따박따박 월세와 이자가 통장에 꽂혀 퇴사한 파이어족일 수도 있는데 그냥 내 맘대로 추측해버렸다.


'마냥 쉬기만 하면 한심해 보일듯 하여'라는 말은 사실 나의 불안이 반영된 추측이다. 


지난 2년간 다시 회사를 다니고 아이를 키우고 사이드 활동도 하고 꾸역꾸역 가득 채운 일상을 살면서 너무 고되어 제발 집에서 가만히 앉아 쉬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더랬다. 그런데 막상 둘째 출산이 다가오자, 매일 아침 갈 곳이 없어진다는 것에 대해, 또다시 아이를 키우다 생기는 잠깐의 휴식 시간마다 느낄 죄책감에 대해, 잠깐이라도 쉬면 도태되는 것 같은 불안감에 대해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텅빈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지는 건 언제쯤 가능해질까?


오늘은 더욱 그랬다. 공장 사람들이 죄 감기에 걸렸으니 별다른 일이 없으면 집에 들어가보라는 아버님의 말에 마냥 신나지만은 않았다. '뭘 해야 하나?' 라는 생각에 말이다.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이가 돌아오기 전 3시간을 '뭘로 채워야 하나?'이다.


시간을 채워줄 일은 많았다. 출산 전 정리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이고, 반찬도 만들어야 하고, 바뀔 수입과 지출에 대비하여 돈관리 계획도 세워야 했다. 그런데 임신 8개월의 몸이 문제였다. 요며칠 수면의 질이 낮아져서인지 늘어져있고 싶었다.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여보 나 오늘은 예상치 못하게 쉬게 돼서

집안일을 뭘해야 될지 잘 모르겠네..

그냥 보너스로 받은 시간이니깐 쉴게


사실 남편에게 허락받을 일은 아니다. 집안일이 안되어있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아니고 제발 쉬라고 할 사람이다.


그냥 나 스스로에게 구하지 못한 '휴식에 대한 허락'을 남편에게 미룬 것이다. '시간을 채우지 않고 비워 둘 허락' 같은 거.


어제 그 56.9도의 이웃이 고맙다며 놓고간 지퍼백 속의 초콜릿을 꺼내고 커피를 내려 소파에 앉았다. 뭐라도 할 것을 종용하는 마음을 커피로 잠재우고 부드럽게 녹는 초콜릿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기분이 좋아지려고 노력해보았다.


그 아저씨에게도 하루의 빈 시간을 꾸역꾸역 책으로 채우지 않고 비워두는 것에 대해 스스로 허락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나는 결국 시간을 비워두지 못했다.


소파에 앉기 전 아이의 침구를 세탁기에 넣었고, 로봇청소기를 돌리기 위해 바닥의 물건들을 다 정리했다.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포장했고, 소파에 앉아서 초콜릿 두 개를 까먹은 뒤 2시간 동안 이 글을 썼다.


이젠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


이 글을 쓰고나서 시간을 비워두지 않은 나에게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아이러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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