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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현 Jul 12. 2023

올리브 나무 사이로


단평 | 허구의 이야기도 진실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각본 상의 사망한 가족 인원수인 65명을 계속해서 25명으로 바꿔 말하는 호세인처럼, 영화는 집요하게 그 경계를 흐린다. 그렇게 현실을 해체하고 나면, 아마 받아들이기도 더 쉬울 것이다. 삼부작에 걸쳐 연속된 줌 아웃은 어느새 재난조차 아득히 넘어선 지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 극장전 | 086 | 서울아트시네마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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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란의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전작인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메이킹 필름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가 다큐멘터리가 아니듯, 본 작품 역시 순수 기록물이 아니다. 영화는 이를 숨기지도 않는다. 저는 영화 감독 역을 맡은 모하메드 케사바레즈입니다.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남자는 자신이 배우라고 관객들을 향해서 말한다. 이제부터 보게 될 이 모든 내용이 픽션임을 잊지 말라고 선언하는 셈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언젠가, 영화가 시작한다는 것은 내가 그 장소에 가서 서있다는 뜻이라고 한 바 있다. 그의 증언에 따라 이 장면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분명 우리 앞에 서있는 남자는 영화 감독처럼 보이나, 본인은 배우라고 소개하고 있다. 즉, 키아로스타미가 아닌 것이다. 그럼 키아로스타미는 거짓말을 한걸까. 그렇지 않다. 그는 정말로 그 장소에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카메라 뒤편에 서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유머와 함께 그는 영화에서 본인이 가지는 위치를 정확히 정의내린다. 그는 영화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스스로 그 속으로 들어가 영화의 일부가 되는 사람이다. 실재든 허구든, 모든 장면들은 키아로스타미가 정말로 거쳐갔던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메타픽션 (Metafiction)의 구조 안에서 그는 영화를 만든다는 의미에 대한 사유를 지속한다.


태도의 측면에서 볼 때, 키아로스타미의 접근은 굉장히 교묘하고, 편의적이기까지 하다. 다루는 대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가 그걸 촬영하고 있는 제작자 본인의 현실과 엄격히 구분되지 않는다면, 이는 빠르게 객관성을 잃고 의도를 의심받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들은 이를 가장 잘 안다. 그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므로, 연출의 개입을 최소화한다. 제일 까다로운 건 사람들이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이 촬영 현장의 분위기에 영향 받는다면,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작자는 카메라를 두는 위치부터 인터뷰 문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들을 고심한 후 촬영에 돌입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목적은 리얼리티를 확보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수많은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들이 철저히 은폐하려는 카메라의 뒤편으로 향한다. 이것 또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현실을 담고자 하는 영화가 이를 무시하면 되겠는가.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한 후, 키아로스타미는 실재와 허구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그의 전작들을 상호 참조하면서 수많은 장면들을 셀프 패러디 및 코멘터리의 소재로 삼는다. 그런 다음, 이 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 역시 픽션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진술의 신빙성을 전부 의심하게 만든다. 이야기를 가두는 모든 경계선들을 지우는 방식으로, 그는 영화라는 입방체를 확장한다.


짐작컨데, 이러한 결정에는 <클로즈업>이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등 전작들을 공개한 후 그가 받았던 일부 비판의 목소리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재와 허구의 구분을 흐리는 이 작품들의 촬영 과정에서, 이야기를 위해 현실 자체를 왜곡하지 않았느냐는 의혹이다. 이런 지적은 그가 단순한 영화 감독이 아니라, 상술한 대로 본인의 제작 프로세스를 영화에 반영하는 독특한 방법론자이기 때문에 유효한 측면이 있다. 가령, 실제 사건을 다루더라도 영화의 스탠스가 확실하면 괜찮다. 다큐멘터리는 실존 인물들을 섭외하여 촬영했을테고, 픽션이라면 전문 배우들이 재연한 것이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은 정체성이 모호하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고 하지만, 작중 드라마를 강화하기 위해 이를 과장하거나 각색한 부분도 많고, 어떤 경우에는 대놓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실제 사건과의 거리를 극단적으로 좁힌 그의 제작 프로세스는 굉장한 리얼리티를 제공하기에, 관객으로써는 진위여부를 가리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매우 설득력있는 알리바이다. 그는 적절한 배율로 실재와 허구를 섞어서 원하는 결론을 유도한다. 그가 마음대로 연출한 장면일지라도 이미 속아버린 관객들은 이를 현실과 결부시키려고 할텐데, 이것이 과연 윤리적인지 의문이 생긴다. 생각보다도 그의 연출 방법은 문제가 많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는 이에 대한 키아로스타미의 자기 고백적인 장면이 나온다. 호세인이 이번 재난으로 인해 사망한 가족 인원수를 말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중간에 스치듯이 지나가는 대목인데, 영화에서는 호세인이 계속 NG를 내는 바람에 몇 번이고 재촬영하는 현장의 모습이 담긴다. 그는 죽은 가족이 65명이 아닌 25명이라고 대사를 자의적으로 고치는데, 이는 키아로스타미 - 정확히 말하면 배우가 연기하는 극중 키아로스타미의 캐릭터 - 와 갈등을 빚는다. 영화 감독은 대본에 쓰인 대로 읽으라고 하지만, 호세인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반복되는 NG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25명을 외치는 호세인의 모습은 우습지만, 사실 전혀 웃을 일이 아니다. 실제로 죽은 그의 가족의 수가 25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사람은 오히려 영화 감독 쪽이 된다. 그는 결국 호세인의 말을 무시하고 대본 상의 인원수인 65명을 관철시키는데, 이란 대지진이라는 현실 속에서 팩트보다 픽션을 우선시했다는 점은 의아하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라는 영화가 가진 추모적인 성격을 감안한다면 특히 더 그렇다. 백번 양보해서 인원수를 틀린다고 해서 신경쓰는 관객들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각본의 내용 그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얼마나 집요하게 이뤄냈는지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 공개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진실성을 놓고 키아로스타미가 법정에 선다면, 이 장면은 그의 범행 자백이나 다름없다. 그는 현실을 딱히 존중하지도 않고 오로지 영화의 편에 서서 작업을 하는 위선자가 되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재그 삼부작의 전체적인 지도를 그려볼 필요가 있다. 첫번째 영화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단독 영화로 기능한다. 약 80분간의 러닝타임 동안 명확한 서사와 인물 관계, 그리고 테마를 내세워 승부를 본다. 모든 것은 영화의 테두리 안에서 작동하고 제작자는 기존의 관습을 지킨다. 두번째 영화인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전작의 현실 후일담으로 역할하는 로드무비다. 여기서 키아로스타미는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작업의 범주를 조금 더 넓혀서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혼합되는 독특한 액자식 구조를 도입한다. 두 영화는 각각 이란 대지진의 전후를 다룬다. 어떤 순서로 보든, 둘 사이에 발생한 재난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이것이 불러일으킨 독특한 정서는 감상의 저변을 영화 바깥으로 확대시킨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봤다면, 자연히 후속작에서 키아로스타미의 여정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볼 것이다. 반대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먼저 본 경우, 지진으로 무너져버린 마을 코케르를 애도하는 심정으로 전작을 감상할 것이다. 이는 전체의 총합보다 훨씬 더 큰 감정적 반응이다. 두 영화는 이 거대한 사건을 중심에 두고 일종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으며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세번째 영화인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삼부작 중에서 가장 이상하다. 사실상 이전의 두 영화가 자아내는 감동에 찬물을 끼얹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지어낸 이야기일지라도, 관객들은 그 속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고 믿으려 한다. 그래서 가령,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나왔던 루히르 노인이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 다시 등장할 때, 우리는 그가 생존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이다. 그런데 키아로스타미는 삼부작의 마지막 영화에서 이들이 동일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정황 근거를 제시하여 믿음의 기반을 구태여 뒤흔들어 놓는다. 이런 대목들은 한둘이 아니다. 초등학교 교사 역을 맡았다는 남자는 프레임 밖의 목소리로만 등장하므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현장감 넘치는 대화들은 수많은 테이크 끝에 얻어낸 인위적인 결과물이다. 전작에서 신혼부부로 나왔던 호세인과 타헤레는 실제로는 깊은 사연을 가진 불편한 사이였음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영화 전체에 걸쳐서 키아로스타미는 진실로 인식될 만한 요소들을 모두 거둬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 둘씩 소거법으로 지우고 나면, 결국 이 삼부작에서 진짜로 일어났던 일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남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의문부호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키아로스타미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바로 촬영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호세인과 타헤레의 연애전선이다. 지진 발생 이전에 타헤레에게 한번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호세인은 다시 그녀에게 열렬히 구애를 한다. 집도 없는 가난한 청년이라는 이유로 타헤레의 가족이 반대했지만, 지진으로 모든 것이 무너진 지금은 둘 다 같은 형편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이들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바람에 촬영이 지연되고 난항을 겪는다. 키아로스타미 역할을 하는 영화 감독은 둘 사이를 중재하느라 정신이 없다. 고집 센 두 사람의 애정 싸움이 숭고한 삶의 의지를 다지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가 제작되는 와중에 진행되고 있었다니, 관객들은 실소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타헤레가 무시하던 말던, 끈질기게 구혼을 하는 호세인을 보며 우리는 어느새 한 마음으로 그를 응원한다. 영화가 끝나기 전에 이 둘의 사랑이 이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결국 러브 스토리다. 수많은 삶들이 멈췄던 그 현장에서도, 또는 진실이라 생각한 것들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에도, 사랑이 시작된다. 조금 비겁한 방식이지만, 호세인 같은 청년에게 이 모든 것은 오히려 그가 오래도록 좋아했던 소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그런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는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는데 말이다. 너무도 천진난만한 방식으로 키아로스타미는 우리의 주위를 현실로부터 돌린 후 영화적 낭만으로 그 안을 채운다. 포기를 모르는 그의 순수함에 우리는 마침내 모든 회의를 거둔다.


어쩌면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지금껏 삼부작의 감상을 지배했던 이란 대지진의 흔적을 전부 지우려는 시도다. 이 비극적 사건의 끝에는 오직 영화 그 자체만을 남기겠다는 의지로, 그는 이야기의 허구성을 본 영화는 물론, 이전 두 영화에도 소급적용하는 실험을 감행하고, 이에 성공한다. 그 결과로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함에 이르고자 한 노력의 기록이다. 그건 호세인이 올리브 나무 사이로 타헤레를 쫓아가는 모습처럼, 어렴풋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렇게 이란은 1990년의 재난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서 키아로스타미는 묻는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이 가짜라는 걸 알고도 감동을 받을 것인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진짜라면,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용히 영화의 주변을 정리한다. 그 속에는 또 다른 삶이 있다. 대지진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처럼, 호세인과 타헤레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하고 사랑할 것이다. 허나, 그렇지 않는다고 해서 뭐가 문제랴. 그것이 곧 현실이고 삶이며, 영화일텐데 말이다. | 극장전 | 086 | 서울아트시네마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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