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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 Jan 12. 2020

향기로 남은 사람

故 임세원 교수 추모집 기고글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그를 세 번 정도 만난 듯한 기분이 든다. 잊을 수 없는 영상으로 한 번, 경희대 백종우 교수님의 추모사로 한 번, 서울대 김재원 교수님의 강연까지. 관사가 없어 곤란해진 친구에게 선뜻 6개월간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간호사를 구하기 위해 안전구역에서 나오는 그를 떠올리며, 그를 추억하는 친우들이 맡았던 은은한 향기를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던 건, 아마 같은 병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2012년 미국 연수를 앞두고 앓았던 허리 디스크와 우울증이, 나에겐 2015년 예과 1학년의 가을에 찾아왔다. 쌀쌀해지는 서울의 좁은 자취방 침대 위에서,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홀로 누워 바라보던, 시리도록 하얗던 정오의 천장. 끝없는 통증에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엄마에게 울며 전화한 후, 본가까지 타고 간 택시 창 밖의 새까맣던 하늘. 밤낮없이 침대에 누워 똑같은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흘려보내던 그 때를 아직 기억한다.


 강연을 보며 알았다. 내겐 회색으로 남은 병이, 그에겐 환자를 향한 공감에 이르는 길이 됐다는 걸.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를 소재로 진행된 임세원 함께 읽기 강연을 보며, 그에 대해 더 알게 됐다. 그는 가족을 많이 사랑한 아빠였고, 환자를 위해 흉부외과의 꿈을 포기하고 정신과를 택한 의사였으며, 우울감과 자살에 사로잡힌 한국을 돕는데 헌신한 애국자였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아픔의 경험을 환자에게 공감하는 자양분으로 삼은 치료자로서의 모습이다.


 “선생님은 이 병을 몰라요”라는,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환자의 말에 “저도 그 병 잘 알아요”라고 대답할 수 있기까지, 그는 얼마나 큰 아픔을 견뎌내고, 우울했던 과거를 곱씹었을까. 새벽녘부터 떠진 눈으로 우울해 한 경험을 담아 설명한 ‘조기 각성’, 쏜살같이 흘러가는 주변 상황에 따라가지 못하고 남겨지는 ‘정신운동 활성지연’,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양가감정’까지.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를 통해 그가 전하는 우울증의 증상들은, 교과서의 단어 하나하나의 무게를 절감케 하고, 의학도에게 환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한다.


 물론, 모든 병을 겪어봐야 진정으로 환자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환자 개개인의 삶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질병과 그로인한 고통을 모두 겪어본 의사는 존재할 수도 없고, 꼭 겪어봐야 치료를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고된 투병생활을 거친 사람은 의학적 치료뿐만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어린 조언을 할 수 있게 된다. “우울증의 원인에 집착하기 보다 우울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데 집중하라”거나, “현실을 살아가는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희망”이라는 메시지로 감동을 줄 수 있게 된다.


 아픔으로 남았던 2015년 가을이, 이제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의 길에 뿌릴 밑거름이 되었다. 그때의 경험을, 이제는 무너진 생활을 궤도에 되돌려 놓으려고 안간힘을 써서 성공한 극기로 기억한다. 그를 세 번 만나는 동안 내가 우울증을 기억하는 방식이 바뀐 것처럼, 그의 발자취가 남긴 향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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