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하지만 믿고 있었나 보다. 숫자와 공식과 부호는 진저리 칠 정도로 싫어하지만, 그것들이 이뤘고, 이루고 있는 업적 앞에 놓일 때마다 공감과, 사랑과, 찬사를, 받쳐왔다. 믿고 있었고, 기대했고, 그래서 든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깨어졌다. 지고하게 품어왔던, 필생의 소원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다.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어요. 절대! 미래로는 어쩌면 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가면 못 돌아오죠. 지금 이곳에서의 나의 1분과 미래로 간 나의 1분은 다르니까요. 결국, 타임머신은... 글쎄요. 타임머신?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그거? 뭘까요?”
국내 최고 과학의 산실 카이스트 박사라는 남자가 한 말이다. 그는 너무도 담담한 얼굴로, 과학도로서의 욕구나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로, 아니 사람이 죽는다는 것 앞에선 누구 하나 대들거나 거역하지 않듯이, 타임머신이라는 것에 대들지도 의심을 품지도 않았다.
“그러니, 타임머신은 없다? 이 말씀인가요?”
누군가가 물었다. 그의 표정은 내 표정과 닮아 있었다. 박사는 그저 조금 웃었을 뿐이다.
전 재산을 타임머신 개발에 투자한 것도 아니고, 과학 발전에 대해선 고백하건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기도한 적도 없지만, 이 배신감과 허무함은 무엇인가.
아마 커피를 세 잔쯤 마셨나 보다. 집안을 뱅뱅 돌며 원고도 쓰다가, 설거지도 하다가, 청소기도 돌리다가... 하루 종일 내가 살았던 집안을 무심코 돌아본 순간이었다.
‘이 집이 내가 타고 있는 타임머신 아닐까? 이 시간이 언젠가는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과거이고, 또 올 내일이 가보고 싶은 미래가 아닐까?’
나는 박수를 쳤다.
기억과 꿈이 있다면 타임머신은 곧 내가 될 수 있다! 기억은 얼마든지 그때로 나를 돌아가게 해 주고, 희망은 품었다가도 다시 원위치로 내려놓을 수 있으니, 미래로 가면 돌아올 수 없는 기계보다 얼마나 더 정교한가! 얼마나 더 우월한가 말이다!
오늘 밤엔 삼십오 년 전 과거로 나를 띄워볼 참이다. 타임머신은 과거로 갈 수 없지만, 나와 이 집은 기억이라는 화로를 돌려 안전하게 그곳에 안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