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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Grace Oct 01. 2024

현실을 넘어, 행복한 사람이다.

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작년 겨울에 해방촌이라는 곳을 처음 갔다.
신기했다. 서울의 한가운데에 이런 동네가 있는지 몰랐으니까.
다시 오늘도 그곳을 찾았다. 복작복작한 오후의, 초저녁의 해방촌을 지나 동행을 먼저 보내고, 늦은 저녁 이전에 찾았던 카페에 앉았다.

” 아 조금 더 따뜻하게 입고 올 걸.”

혼자 루프탑에 올라 찬 바람을 맞으며 혼잣말을 되뇐다.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아 안으로 들어와 생각의 꼬리를 만들어본다.
들리는 음악 소리는 이 카페에서 나는 소리일까, 다른 카페에서 나는 소리일까.
이 카페에서 나오는 음악이라 하기에는 작고 , 다른 공간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멀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한번 더 하다, 현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실수다.
현실이라는 것을 떠올리자마자 숨이 턱 막혀온다. 공황도 아니고 , 천식도 많이 나아졌는데 숨 쉬기가 어려워진다.

 현실은 잔인한 것이다. 밤공기가 시원해지고, 도시의 불 빛을 먼 곳에서 바라보는 낭만은 아름답지만, 현실이라는 것은 꽤 잔인한 것이다. 매 달 출금되어야 하는 대출 이자를 계산해야 하고, 카드값을 계산해야 한다. 휴대폰 요금을 납부해야 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지루한 지하철 안에서 왕복 두 시간가량을 소모해야 한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잠에서 깨기 위해 마셔야 한다.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피워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잔인한 현실에 무너져 버려야 하는가?
이 현실이 마음껏 나의 마음을 짓누르고 유린하도록 방관해야 하는가?
그럴 리가, 사실 어쩌면 현실이라는 것은 나를 도와주고 있다.

어두움에 대한 주관적 개념이 없으면, 빛에 대한 주관적인 개념도 없는 것이다.
슬픔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없다면, 기쁨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과 감사도 없는 것이다.
결국 양 면이 존재한다.

이 현실이 있기에, 지루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나날들이 있기에 나는 하루 쉬는 날 느끼는 모든 것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으며, 매 순간을 더욱 만끽하려 노력한다.
예술의 한 페이지조차 허투루 넘길 수 없기에 더욱 집중하려 한다.
압박이 있기에 나는 자유로움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 현실은 다른 무엇인가가 되기도 한다.
뛰어넘어야 하는 무엇인가가 되기도 한다. 사실, 실체가 없는 그 무엇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일 수 있다. 다만 현실은 [실체]가 없지, [실재]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다. 

글을 기고하기 시작한 후부터 신앙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으려 했다.
부끄럽게 여겼다기보다는 혹 누군가가 불편해할까 봐 조금 자제하려 한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조금은 더 솔직해져보려고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기고하는 글에 있어서 무엇을 판단하거나, 누군가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가며 배운 글은 그런 용도로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여하튼, 크리스천으로서의 현실은 결국 뛰어넘어야 하는 대상이다. 그리고 그 논리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면, [이미 승리하였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미 승리하였는데 왜 현실은 고통이 수반되며, 뛰어넘어야 하는 노력과 씨름은 왜 계속되는가?

[전쟁]과, [전투]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전투의 하나를 치르고 있다. 사실 이 모든 일들의 결괏값은 동일하다. 전쟁에서 이미 승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지금 치르고 있는 [전투]는 무엇인가?
크리스천적 언어로 말하자면_승리의 면류관을 취하기 위한 전투인 것이다.

[야고보서 1:12, 새번역]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내가 몇 달 만에 다시 글을 쓰며 적는 이유는, 더 이상 우울의 가운데서 글을 쓰고 싶지 않아서이다. 십 수년을 병원에 다녔고, 이제 병원에 다니지 않은지 1년 조금 넘었다.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확언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자기 최면의, 플라세보의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의 삶을 온몸으로 부딪혀 살아보고,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또 온몸으로 부딪혀 살아 내 본 결과들을 보고 내린 답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압박과 현실의 고통을 1년 전, 2023년 4월의 내가 겪었으면 어땠을까?
또 한 번의 자살시도가 있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안정제 없이는 단 한순간도 견디지 못했으리라 확신한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웃고 있다. 기쁨으로 삶을 살아내고 있다.
무너지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감사하며,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누군가는 나를 기분 나쁜 아이로 기억하겠지만,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사랑받는 존재이다.
회의와 냉소와, 환멸과, 혐오와, 증오에 낭비할 시간이 나에게는 없다.

기쁘고, 감사하기만 하여도 시간은 나에게 부족하다.
해방촌의 저녁과 야경이 나에게는 낭만이었고, 현실이 나에게 고통이었던 적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글을 통하여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것은,
이제 나에게는 모든 순간이 낭만이다. 모든 순간이 행복이다. 모든 순간이 기쁨이고,
모든 순간이 감사이다.

나는 현실과 관계없이, 이 현실을 뛰어넘었고, 행복한 사람이다.


[신 33:29, 쉬운성경] 이스라엘아, 너희는 복을 받았다. 너희와 같은 백성은 없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구해 주신 백성이며, 여호와께서 너희의 방패시고 너희의 돕는 분이며 너희의 영광스런 칼이시다. 너희의 원수들이 너희에게 패하겠고, 너희는 그들의 높은 신전을 짓밟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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