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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 Mar 16. 2024

J와 음악

출국을 앞둔 날. 독일에서 온 P와 그녀의 고향친구와 하루종일 쏘 다니다가 저녁을 앞두고 헤어졌다. 며칠간 내 머릿속은 J와 좀 더 친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가득했는데, 그가 너무 내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일단 해보고 후회하자. 나 여행자잖아. 다시 볼거 아니잖아. 빨리 연락 안하고 뭐해?


J. 나 오늘 너가 추천해준 바 가려고 하는데 시간되면 같이 갈래? 편하게 말해줘.


좋아, 아주 케주얼하게 물어봤어. 잘했어. 자연스러워.


나 I(처음 만났던 재즈바)에서 연주 중이야. 얼른 와!


I에 가려면 현금이 필요했지만 이미 현금을 다 쓴 상태였다. 아 몰라. 현금 인출해. 오늘 마지막 밤이야. 화장을 수정하고 옷을 갈아입고 앞침대 프랑스인 부부에게 신발까지 골라달라고 했다. 어차피 둘다 운동화였지만. J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내가 도착했을 즈음에 그는 연주 중이었고 우리는 눈짓으로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가 연주할 동안 나는 바 자리에 앉아서 모로코에서 왔다는 아저씨와 한참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자신의 상사가 한국인인데 그에게서 받은 것이 많다고 한국인인 내게 술 한잔을 꼭 사고 싶다고 했다. 그가 레몬 사와를 사서 건네자 J는 まじで?  まじで?  (진짜야= 정말로)하며 놀라워했다. 연주를 하지 않을 때마다 J는 내가 있는 자리로 와서 시간을 보냈다.


너 향수 뭐 뿌렸어? 너한테서 되게 좋은 향기나.


뭐야. 이 드라마에도 안나올 것 같은 플러팅 멘트는? 너무 웃겼지만 J를 위해 나는 참아야했다. 아무 것도 뿌리지 않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실제로 일본에 아무 향수도 챙겨가지 않았다) J는 내 영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반대로 J가 하는 일본어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번역기가 열심히 우리의 대화를 이어주었다.


나: 연주 안하는 낮에는 뭐해?

J: 고등학교에서 음악 가르쳐. 아이들한테. 다른 바에서 세션으로 연주도 해. 나는.. 나는 음악없이 못 살아.


나는 J가 좋은 남자가 아니라는 것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여자들이 많을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내가 가진 가치관과 그의 가치관이 많이 다를 것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나는 단 한번도, 그것 없이는 살지 못할 것이라는 큰 무언가를 만나지 못했는데. 너는 20대에 벌써 그런 것을 찾았구나. 당시 나는 J가 참 좁은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그만의 깊고 넓은 우물을 이미 찾았으니 그 곳을 탐색하는데 평생을 바칠 지도 모를 일이다.

.

.

.

J는 마지막 연주를 앞두고 있었고 나도 너무 늦기 전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J: 술 한잔 더 할래?

나: 좋아.


J는 근처 돈키호테로 날 데려가더니 캔맥주를 건넸다. 호텔 앞 길거리에 서서 한참을 대화했던 것 같다. LP이야기, 여행 이야기, 음식 이야기, 어느 동네에 사는지, 앞으로 무얼 하며 살건지. 그날 나는 조금만 기다려 달란 말을 열번도 넘게 한 것 같다. 서로 빠르게 번역기에 할말을 적어 내려갔음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말의 속도를 번역기가 따라가지 못했다. 같이 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J가 물었다. 일본 남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남자친구 만들고 싶은 생각있어? 나는 예의가 바른 것 같다고, 3년전에 헤어지고 남자친구 없어- 라는 동문서답을 하고는 애써 모른 척을 했다. J는 내가 타는 지하철이 오는 것을 기다려주었고, 갑작스런 포옹으로 날 놀라게 했다.  Have a safe flight -라는 말과 함께.


그 뒤 주고받은 연락으로 나는 생각보다 더 J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느꼈다. 우린 비슷한 음악을 좋아하고 서로를 궁금해 했지만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난 여전히 J의 삶을 응원하고 있다. 그가 음악을 연주할 때 얼마나 행복한 표정을 짓는지, 음악이 그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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