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게도 최근 도쿄로 출장을 갔을 때 마지막 날 짧지만 몇 시간의 자유 시간이 생겼다. 3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마치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업무로 꽉 채워진 분주한 일정을 마친 후 별다른 계획 없이 도쿄 거리를 나섰고 문득 작은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가게 된 곳은 바로 미술관이었다.
왜 미술관인가?
사실 작년에도 도쿄 출장 마지막 날 짧은 자유시간이 생겼고 호텔 근처에 위치한 아티존 미술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초 계획에 없었지만 가까운 곳을 찾다 보니 우연히 들어가게 된 곳이었다. 그런데 미술관을 들어서자마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일본의 현대미술가 야마구치 아키라부터, 피카소와 로댕 같은 거장의 작품들까지 예상치 못하게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cf. 야마구치 아키라 - 일본의 전통적 야마토에(유채화기법)와 우키요에(판화) 기법을 기반으로 일본 애니메이션과 대중문화 특유의 압축적이고 치밀한 디테일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사실 방문 전까지 아티존 미술관에 대해 전혀 몰랐다. 나중에 찾아보니 2020년에 개관하였고 이전 브리지스톤 미술관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우연히 방문해 본 아티존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의 다양성과 규모는 인상주의와 모더니즘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고 예상 밖의 깊이와 스펙트럼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건 그렇고 예기치 않은 방문 치고는 놀라운 성과가 아닌가?
올해도 찾아온 우연
올해도 작년과 같은 우연이 또 찾아왔다. 작년과 똑같이 도쿄 출장 마지막 날 짧은 자유시간이 생겼다. 작년의 기억을 가지고 당일 모든 업무 일정을 마치고 우에노로 향했다.
우에노 공원 안에 다양한 미술관들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안의 미술관들을 돌아보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휴관 중인 곳이 많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공원을 나가려고 하니, 모네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미술관 밖과 안이 붐볐다. 티켓을 사려고 기다리는 줄도, 티켓을 사고 나서 입장을 대기하고 있는 줄도 너무 길었다.
예상치 못한 인파 속에서 혼잡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이번번 전시는 포기하고 기념품샵에서 기념품 인형 하나 사는 걸로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고 신주쿠로 향했다.
그렇게 찾은 곳이 솜포 미술관이다. 우에노의 미술관 방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난 뒤, 다음 행선지인 신주쿠에서 그저 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보니 가게 된 곳이었다. 그나마 가까운 곳임에도 초행길이라 묻고 헤매고 묻고 헤매며 도달한 솜포 미술관.
그리고 그곳에서 기획 전시되고 있던 카날레토와 베네치아의 영광이라는 전시를 보게 되었다.
전시회 작품의 작가는 베네치아 풍경화가 카날레토, 본명 조반니 안토니오 카날(Giovanni Antonio Canal).
사실 잘 몰랐던 작가인데 카날레토는 베네치아를 세심하게 그린 감상적인 풍경화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사진기의 선조 격인 카메라 옵스쿠라를 활용해, 이전의 미술에서 흔치 않았던 건축물의 세부 묘사를 실현한 화가였다.
베네치아의 경관을 자세하고 촘촘하게 묘사하였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섬세하게 포착하면서도, 미묘하게 조작된 시점으로 현실을 초월한 장관을 그려냈다.
그렇다 보니 실제로 한 작품 안에 여러 시점이 담겨 있어, 단순한 사진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독특한 감동을 선사한다.
여러 층을 이동하며 카날레토의 작품을 둘러본 뒤 마지막 층에 다다르자, 어떤 어두운 공간의 구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세상에. 고흐의 해바라기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솜포미술관에 입장할 때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있길래 언젠가 기획 전시를 했었던 걸까 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진품이라고 한다. 가까이서 보니 미술교과서에서 본 바로 그 그림이었다.
(cf. 예전에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었었지만, 결국 반 고흐가 생레미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렸던 7점 중 하나라는 것이 인정되었고 1987년에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425억 원에 판매된 후 솜포미술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에서도 곧 12년 만에 고흐의 진품 전시회가 있을 예정이라고 하여 얼리오프닝 때 관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흐의 대표작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기회에 그의 대표작인 해바라기를 도쿄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해바라기는 홀로 고요한 공간을 채우며 깊은 여운과 잔잔한 위로를 주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적당한 삶의 아름다움
어쩌다 보니 매년 방문하게 된 도쿄의 미술관에서 얻은 깨달음 중 하나는 바로 우연의 소중함이다.
작년에 방문한 아티존 미술관도, 금년에 방문한 솜포미술관도 사전에 특별한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업무 출장 차 가게 된 행선지에서 갑자기 생겨버린 여유 시간을 활용하여 '우연히' 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한 곳에서 원하는 것을 찾거나 혹은 기대하지 않았던 더 중요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행운이 있었던 것이다.
최근 나의 삶의 방향성과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것 같이 보여 불안하고 걱정되었다. 노력과 관심, 에너지가 특정한 곳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분산되거나 소실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노력의 결과나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 스트레스를 받았다.
우리 삶의 방향과 목표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삶은 우리가 세운 계획대로 절대로 흘러가진 않으며,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나에게 더 이롭다고 할 수 없을 때도 많다.
그래서 오히려 적당하고 느슨한 방향, 유연한 태도, 그리고 우연을 허용하는 마음이 때론 더 값지지 않을까? 완벽함을 쫓으며 철저히 계획을 세우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지키지 못했을 때 우울해지고, 어찌어찌 계획을 완수했다고 한들 그 후 탈진해 버리는 그런 삶이 아니라, 적당한 계획과 적당한 여백을 두고 우연이 만들어 주는 더 완벽한 순간을 선물 같기 받고 즐기는 삶 말이다.
도쿄의 짧은 자유 시간 속에서 만난 예술은 내가 계획하지 않았던 우연의 선물이었다.
이 가을, 나만의 느슨한 자유 속에서 그렇게 인생의 또 다른 의미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