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 몇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 주세요.
공기처럼, 물처럼,
나의 주위를, 나의 빈틈을 감싸고 휘몰아치는 그것.
그것은 많은 것을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인다.
나와 타자의 다름은 역설적으로
결합의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그 다름은 배척하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을 확인시키고 존재케 하는 기쁨이다.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 소수자의 입장에 선다.
나는 아시아인이다.
남성 위주의 직업군에서 여성이다.
여성 위주의 세계에서 남성이다.
이 비행기 안 채식주의자는 혼자다.
영어가 불편한 사람은 나뿐이다.
이 일을 하고 싶지만 비전공자이다.
...
이 모든 다양한 순간에 우리는 각자의 맥락을 가지고 이방인으로 존재한다.
분류하기를 좋아하고 편을 만드는 것에 익숙한 사회일수록 이와 같은 다양성은 배척된다.
나와 다른 것은, 나와 다른 사고방식은
나와 다른 어투는, 나와 다른 행동방식은
문제 있는 것으로 단정된다.
그것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일까?
상식이나 관습을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옳다는 편안함,
그것이 발전되어 '나' 자체는 옳다는 자만,
안정감, 다수에 속함이 옳음을 증명한다는 믿음.
상대의 이야기는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 무지의 신속함.
당당함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나 집단은 위험해 보인다.
그는 언제라도 타인을 판단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모든 관계에서 판사봉을 쥐고 있다.
자신의 믿음이 환상일 수 있음을
자신이 아는 것이 다가 아님을
그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는 그 무지 속에
자신의 생활, 안락함의 둥지를 튼다.
그러나 그 무감각은 타인을 해칠 수 있기에
타인의 삶에 무례하게 침입하는 순간
자신만의 순진함으로 끝날 수 없다.
그것은 파급력을 갖는다. 그것은 폭력이 된다.
자신만 모를 뿐 속고 있는 이는 그이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으로부터 배척받고
그들의 무례함을 감수하며 살아가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저 모습을 보라고
세상이란 그런 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말할지 모른다.
그 자신만만한 이들은
침묵이 용인과 동의어가 아님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침묵하고 있는 이들은
단지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음을 철저히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을 영화관에서 구경하기만 한다면
극장 천장을 뚫고 쏟아지는 물을,
엘라이자의 삶을, 그녀의 감정을
그녀의 고통과 행복을, 관능의 깨어남을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로 인해
조금씩 바뀔 것이다.
아주 천천히라 할지라도.
그들 자신은 그 세상을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변화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표어와는
아무 상관없는 깊은 곳에서
고요히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물속에서 태어났다.
한 여성의 뱃속에 담긴 물속에서
우리는 열 달을 보내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 물이 우리에게 뇌를, 눈을, 손을,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물속에서 형태와 기능을 만들어 갔다.
물은 있는 그대로의 생명을 존중하며
우리를 감싸고돈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심어준다.
파괴할 힘은 사랑 없이도 얻을 수 있지만
키우고 만드는 힘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땅 위에 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태어난 물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물의 시간은 사랑의 의미를 떠올린다.
아마도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과는 큰 상관이 없다.
그것은 말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그 힘은
우리를 감싸고돈다.
사람은 그것의 부력을 받아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는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야 하는
자신만의 뚜렷한 이유를
닫힌 문을 터뜨리며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물의 힘처럼
어느 날 강력하게 깨닫고 만다.
bitterSweet life + cinema
text by 엘렌의 가을
타이틀 이미지 출처: 영화 <The Shape of Water>
후기:
<셰이프 오브 워터>를 무척 인상적으로 보았습니다. 초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현실에 대한 인식을 이끌어내는 놀라운 힘을 가진 영화였습니다. (가끔 '그거 SF 아니야?'라고 질문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영화가 아닌가 묻는 분이 계십니다만, 현지의 뉴스들은 "정치적 의식으로 찬 이번 오스카"의 선택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흥미로운 공존입니다.)
화면과 음악, 스토리의 세부 구성은 환상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저도 비교적 늦게 보았는데, 영화를 보고 온 다음 날, 이 영화가 오스카 작품상, 감독상, 음악상, 미술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수상 소식보다도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Gómez)의 소감이 기억에 남습니다. "멕시코에서 자라난 내게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말은 그 역시 이방인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의 환상적 상상력은 분명히 그의 삶으로부터 왔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관에서 내리기 전에 권하고 싶어 서둘러 글을 올립니다.
부제 '사랑의 모양'은 국내 개봉을 위해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랑의 모양'은 원제가 품은 의미의 폭을 다소 좁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셰이프(shape)'를 말하지만 '물'은 사실 고정된 형태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흥미롭게 다가오는 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