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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슈가 Feb 04. 2020

타인의 피드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취향이 곧 나라고 오래도록 믿어왔다. 핀터레스트에 모아둔 포스터들이,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한 아티스트들이, 왓챠에서 5점을 남긴 영화들이 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늘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신뢰하던 사람은 나를 ‘1을 가져도 10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10과 1 사이의 괴리를 좁히는 게 너의 숙제가 될 거라고, 진짜 너를 들여다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무엇을 잘하나?’, ‘나는 무엇을 잘 아나?’, ‘내가 가진 신념이 정말 나의 것인가?’ 같은 질문을 멈추지 말라고 했다. 게을렀던 나는 쉬운 방법을 택했다. 뭔가를 좋아하는 것 그리고 그걸 내 곁에 두는 것. 핀터레스트 보드는 많아졌고 인스타 팔로잉은 2000을 넘어갔다. 왓챠에서 본 영화를 늘리려고 어릴 때 본 <바비와 마법의 페가수스>까지 끌어모았다. 그런 나는 종종 멋져 보이기도 했다.


쉬운 방법은 들키기 쉬웠고 나한테 가장 많이 들켰다. 그런 날이면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만든 사람을 질투했다. 누구든지 질투할 수 있었다. 탄탄한 몸을 가진 운동 유튜버, 영리하게 돈을 모으는 에디터, 기깔진 레터링을 만드는 그래픽 디자이너, 신경 안 쓴 듯 힙한 인스타 사진을 올리는 친구. 감기는 눈으로 피드를 넘기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질투는 내일의 나를 피곤하게 했다. 피곤한 날에는 나를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어김없이 남의 피드를 들여다보던 어느 날이었다. 불현듯 머릿속에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 네가 될 순 없어.”


그 문장을 트위터에 싸지르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럼 대체 무엇이 나란 말인가? 그때는 내가 만든 것이 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디자인한 것들로 나를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열심히 작업을 하고 거기서 ‘진짜 나’를 발견했더라면 전개가 참 아름다웠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디자이너가 디자인의 주인공을 자처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누가 봐도 네가 한 디자인이네.’보다 ‘XX 브랜드에 딱 필요했던 디자인이네.’ 하는 칭찬이 더 좋게 들릴 즈음부터 디자인으로 ‘나’를 드러내려는 마음은 좀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나를 알고 싶다는 욕심은 버리지 못했다. 그러다 친구의 글쓰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글이라는 것은 참 투명해서 솔직하지 못하면 금세 티가 났다. 거짓말을 싫어하는 나는 못생겨도 솔직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글 속에서 내 모습을 몇 개씩 발견하게 되었다. 그 모습은 구질구질했으며 사랑에 취약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글로 쓰는 건 그걸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이었고, 내가 인정한 내 모습은 이상하게 귀여워 보였다.


가수 아이유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하고 노래를 불렀다. 정재윤 작가는 ‘여태껏 이렇게 나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라고 썼다. 나를 계속 귀여워하다 보면 나도 언젠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질투나!



*러네이 엥겔른,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2017)의 제목을 빌려왔다.
**아이유, <팔레트> (2017) 中
***정재윤, 「작가의 말」, 『재윤의 삶』(2019)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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