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늙어가는 딸이, 어버이날에
어버이날이다. 드릴 것은, 마음을 보일 것은, 그나마 돈 밖에 없어서 자식된 도리로 건네드리고 싶은데, 선뜻 드리고 싶은 만큼의 돈을 드릴 수 없어 어느 정도가 적당할지 재고 또 재보는 내가 슬퍼지는 그런 날.
예쁜 손녀를 보기 위해 왔다던 아빠는 오늘도 소파에 어정쩡한 자세로 누워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허름한 츄리닝 바지 한 쪽을 걷어 올린 채 연신 아픈 다리를 문질러 댈 뿐이었다. 침도, 물리치료도, 도수치료도 그 어떤 치료를 해봐도 차도가 없었다는 다리에 손을 올려본 들 변화가 있었을까. 무용한 일에만 손을 쓰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해졌다. 분면 고통이란 지극히도 개인적인 것이어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고통은 함께 느껴줄 수 없다. 밤새 고열로 시달리는 아이를 보며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말은 쉬이 뱉을 수 있었지만, 그 아이로 인해 간신히 청한 잠이 끊어질 때의 짜증, 그것이 내가 진짜 느낄 수 있는 고통의 전부였다. 아빠의 고통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나를 먹이고 재우고 입혀 키워내기까지 말도 못할 내적, 외적 고통이 있었겠지만 나는 아마도 아빠의 바람대로 그런 고통 전혀 모르고, 해맑게 자라났다. 그리고, 눈에 뻔히 보이고, 엄마의 입을 통해 내내 전해지는 아빠의 병치레들에도 그리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이제 중년이 되어버려서일까. 노년이 된 아빠를 떠올려 보면 마음이 저릿하며 눈물이 차오른다. '엄마'를 불러보는 것은 나이를 불문하고 마음 한 켠이 에리고, 눈물이 나는 게 당연하다지만 어릴 적에는 아빠를 떠올리며 눈물이 나진 않았다. 그만큼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빠는 이런 나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 당연한 사실을 반박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죽음까지 가는 길, 나이들어간다는 것이 슬프다. 소멸의 과정. 신체의 모든 기관이 그 기능을 잃어간다. 특히나 든든하고 듬직했던 아빠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은 문득 큰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언젠가 나보다 먼저 돌아가실 것임이야 알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앙상해지고, 야위어가는 모습까지는 상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나이 듦이 서글퍼지고 예전같지 않은 모든 것들이 아쉬워지는 때가 되었으니, 나의 부모님은 더하시겠지. 필연적으로 나보다는 먼저 늙어갈 수 밖에 없는 부모님 앞에서 나이듦을 한탄할 수만도 없다.
어두워지고, 주름지고, 초췌해진 나의 아버지의 얼굴 옆에 희디 흰 그의 손녀의 얼굴이 겹쳐진다. 뽀야디 뽀얀, 말간 얼굴을 곁에 대자 더 초라해지는 모습. 나의 아이를 먹이고 키우고 안아주고 사랑을 표현하는 만큼 나는 나의 부모님께 그리하였는가. 내가 낳은 싱그러움과 그 싱그러움이 있기전에 생기 넘치던 부모님의 얼굴을 그려본다. 나는 수없이도 과거를 돌아보고 예전을 그리워했었지만 단 한 번도 부모님과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들 자체를 다시 그려보며 그리워했던 적은 없었음을 깨닫는다. 이제야, 어릴 적 나를 떠올리보며 그 옆에 항상 있었던 그에게까지 시선이 닿는다.
MD를 아는가? 20년도 전에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아빠가 당시에 거금 20만원을 주고 딸인 나의 생일 선물로 사 왔던 것. 정사각형 네모난 기계에 형형색색의 디스크를 넣으면 하나의 디스크에 몇 백곡을 담아 들을 수 있다던 그 것. 그러나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것. 바로 몇 개월만에 세상에 등장한 혁신적인 기술, MP3에게 밀려 빠르게 사라져 버린 그 것. 음악을 많이 담을 수는 있지만 담기 위해서는 그 시간만큼 노래를 들어야 했고, 녹음을 해야 했다. 원하는 노래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맞춰서 녹음버튼을 눌러야 하는 테이프와 다를 바가 없었고, 그 네모에 담을 수 없는 수많은 곡. 용량이 무색하게도 자신의 능력에 비해 현저히 작은 음악만을 나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이어폰 새로 음악이 흘러나오게 귀가 터질듯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음악도 들어봤지만, 아이들에게는 단지 소음이었을 뿐. 그 어떤 궁금증도, 호기심도, 관심도 얻지 못했다. 아빠는 늘 그런 식이었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으나 그 최선은 당신만의 것이었을 뿐, 세상도 나도. 그리고 특히 아내인 엄마를 만족시킬 수도 없었다. 어딘가 부족하고, 아쉽고, 어긋나 있었다. 그래서 늘 안쓰러웠고, 애달펐다. 아빠는 그런 존재였다.
어린 시절, 엄마는 나의 앞에서 아빠의 무능함을 얘기하기 하는 일이 잦았다. 물론 어느 정도 사실이었던 것은 인정한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직업이었다. 비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돈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아주 작았다. 노동에 비해 벌어오는 돈이 적다는 단순한 사실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남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어 늘 손해를 본다는. 하소연과 푸념이었다.
실제로 어느 날 옷장의 모든 옷이 꺼내져 나오고 그것이 가방에 담겨 나가네, 마네, 죽네, 사네 하던 말들이 오가던 날의 기억을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옷장 안에 자리한 옥돌장판들이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돈벌이를 해결하겠다며 옥돌장판의 피라미드 세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안 되어 남에게는 하나도 판매하지 못하고 우리 집 장롱 안에만 차곡차곡 쌓여가던 길이었을 것이다. 최근에도 만병을 낫게 한다는 신비한 생명수라며 집 한편에 그냥 하얀 물들을 쌓아 놓기도 한 아빠였다. 검색결과 차라리 생수였다면 나으련만,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어 건강을 오히려 해칠 수도 있다고 방송에 사기 혐의로 나왔던 물들이었다.
본업은 목수였다. 우리 집 인테리어를 맡아 어느 부분의 일을 아빠가 담당해 하기까지, 나는 아빠가 일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밤에 돌아온 아빠의 작업복은 늘 먼지 투성이었고, 달려드는 나를 안아주려 하며 엄마는 재빨리 말리고 아빠를 깨끗이 씻고 오라며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모든 아빠들은 그렇다는 것을 뒤늦게 나의 아이의 아빠, 남편을 보면서 뒤늦게 깨닫긴 했지만) 아빠는 어느 곳에나 머리만 대면 무서운 크기로 코를 골며 쓰러졌고, 항상 피곤했고, 가끔 다쳤으며, 자주 아팠다. 손톱에 든 멍이, 대충 감아 놓은 밴드가, 온몸에 상처가 어린 나이에도 보였다. 모른 척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것이 아빠를 위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웅하러 나온 길, 아빠의 차 뒤쪽은 형편없이 찌그러져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길에 갑자기 달려든 차 때문이라고 했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했다."앞은 또 왜?"뒷범퍼만큼이나 상태가 좋지 않아보이는 건 앞범퍼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아빠가 주차를 하다가 보지 못한 벽 때문이라고 했다. 아빠가 보지 못한 벽과 아빠를 보지 못한 차 때문에 차는 앞뒤가 흉측하게 구겨져 있었다. 불과 며칠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대각선으로 구겨져 있는 차 상태에 과연 어떤 사고가 났던 것인지 궁금해 하리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지금껏 치이며 살아 온 아빠를 위해 차 한 대 뽑아주고 싶지만 그럴 능력도 채 쌓지 못하고, 어느덧 늙어버린 딸이. 마음으로만, 아빠에게 어버이날을 앞두고 말해본다.
고맙다고.
애썼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