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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살 May 20. 2020

코로나, 산후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고마운 존재

모든 출산 후 '자가 격리자'에게 보내는 위로


일상이 무너져 내렸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의 일상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트레이닝 복 차림의 생머리 그녀들이 바닷가를 전력으로 질주한다. 무거운 카메라를 손에 든 여성은 들에서 자전거를 탄다. 대형 PPT 화면 앞에 선 여성은 대중 앞에 발표 중이다. 하나같이 치렁치렁 긴 머리를 흩날리던 그녀들이 정면을 보고 웃음을 짓는다. 클로즈 업. 그리고는 말한다

'나의 소중한 일상을 지키세요'.

"나의 일상을 지키는 힘, 머쉬론"


피임약 광고였다. 순간 머리가 띵 했다. 처음 화장실에서 셋째를 임신했음을 확인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임신 테스터 끝에 묻힌 소변이 퍼져나가더니 끝내 선명한 빨간 두 줄을 보여주고 말았던 그 순간. 같은 속도로 두 줄의 뜨거움이 눈에서도 쏟아져 내렸다. 그때는 명확하지 않았던 눈물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던 거구나. 멍허니 앉아 TV를 응시하던, 긴 머리를 뎅강 잘라버펑퍼짐한 츄리닝 차림의 아줌마에게 그녀들은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일상을 지키지 못하게 될 거야.  


그녀들이 옳았다. 임신과 출산은 '일상을 파괴했다'.   아이 둘이 있었지만 정신없는 아침을 보내고 나면 그래도 내 시간이 있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운동을 하고 샤워를 즐길 수 있었다.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생겼다. 미술관에 가고 책을 읽을 수 있는 틈이 생겼고 그것을 일상이라 부르는 하루들이 이어졌다. 큰 아이 9살, 작은 아이 6살. 간신히 얻어낸 일상이었다. 소중했다. 그런데 갓 태어난 아이는 그 시간들을 또. 다. 시 사라지게 했다. 잠들고 싶을 때 잠들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 수 없었다. 나의 하루의 시작과 끝은 아이가 정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원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외식이 다 무엇인가, 제 때 입에 먹을 것을 쑤셔 넣기도 힘들었다. 큰맘 먹고 끊어놓은 요가 6개월 수강권은 무용지물이 됐다. 샤워, 소변, 대변, 화장실에서 해야 하는 필수적인 일들을 하려 할 때마다 아이는 정말 '귀신처럼' 일어나 울음으로 나를 불러 제꼈다. 젖은 채로, 벗은 채로, 싸다 만 채로 부름에 응했다. 무너진 일상의 틈에서 삐져나온 것은 우울함이었다.


그런데 그때! 코로나가 모두의 일상을 덮쳐왔다.


막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내던 그때, 얼핏 뉴스 말미에서 중국에 이상하고 괴이한 질병이 퍼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해외토픽쯤으로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이야기가 아니었고,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가 아녔으며, 나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닌 때였다. 그리고 아이가 50일이 되던 날. 코로나는 뉴스의 앞자리를 차지하더니 곧 이어 모든 부분을 삼켰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무너진 일상에 허덕이게 되었다.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아무 의심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들이 두려운 일이 되었다. 고립, 외출 자제로 인해 우울감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코로나 블루', 코로나 우울증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산후우울증을 이해해 줄 사람들이 생긴 것만 같았다. 나만 이전의 사소한 일상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고 말았다.  




출산을 마치고,

나는 산후 자가 격리자였다.

 

모든 출산을 마친 산모는 격리 상태를 겪는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와 역시 모든 자극에 연약해진 자신 때문이다. 외부에는 피해야 할 것 투성이었다. 삼칠일 동안은 외부인과 만남을 자제해야 한다.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외출은 허락되지 않는다. 아이가 조금 더 큰 데도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는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랜 외출은 불가능하다. 24시간 좁은 방구석에 머물러야만 하는 끔찍한 상황은 나의 우울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3시간마다 찾아오는 수유시간 때문에 그 좋아하던 영화관에도 갈 수 없었다. 밤문화를 즐길 수도 없었다. 외면하고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던 종로, 명동, 신촌 번화가의 네온사인마저 그리웠다. 술 한 잔 걸치고 싶었다. 외식, 외출, 여행, 만남, 술자리. 모든 것이 금지되는 자가격리 상태였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이 모든 원망은 아이에게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이' 때문에, 바로 '너' 때문에 나는 여기 갇혀 있구나. 저 밖에는 내가 즐길 수 있는 온갖 즐거움들이 생기를 띠고 퍼져 나가는데 나만 이렇게 갇혀 있어야 하는구나. 원망했을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코로나 19 덕에 (?) 내가 그리워하던 모든 것은 공식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영화관이, 음식점이, 노래방과 주점이, 피해야 할 곳이 되었다.  아이 때문이 아니라 코로나 때문이었다. 아이가 없었어도 이 모든 것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아이를 향해 쏟아지던 미움을 막아 주었다.


언젠가 우울의 원인은 '귀'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하지 못하는 일, 할 수 없었던 일, 허락되지 않는 일들을 하고 사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바닥으로 바닥으로 가라앉던 나의 마음을 떠올리며 정답이라 여겼던 것 같다. 이번에는 '귀'가 나를 우울에서 꺼내 주었다.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했다. 세상에 고립을 겪고 당연하던 삶이 궤도를 벗어나버린 것이 나뿐은 아니라는 사실은 우울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사다리가 되어주었다.   


TV에서는 캠페인으로 코로나로 인해 집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 좋을 거라며 여러 가지 대안을 방송해 주었다. 가벼운 스트레칭, 집에 꽃 키우기를 시도했다. 효과가 있었다.

나를 위해 무언가를 사주는 일은 꽤 힘을 준다. 전혀 안 사주던 꽃일 때는 더욱더


마스크가

나의 초라함을 가려주었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윤기 없이 푸석한 피부,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카락, 무언가 다 소진해버린 것만 같은 표정. 그런 표정으로 늘 집을 보러 온 우리에게 '못 치워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집이 너무 좁아서 벽에 걸린 결혼사진이 지나치게 크게 느껴졌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 속 여자와 내 앞의 세입자가 같은 사람이라고 믿을 만한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결혼사진 옆에는 으레 '서준이의 백일을 축하합니다'같은 문구가 적힌 파스텔톤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서준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그 아이는 알록달록 원색의 장난감들을 부엌 겸 거실이 가득 차도록 늘어놓고 놀다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부동산 직원과 남편과 나는 그 원색의 장난감들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집을 봤다.
 - 장류진 소설 <도움의 손길>中


이 소설을 읽으며 윤기 없이 푸석한 피부,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카락, 무언가 다 소진해버린 것만 같은 표정이던 나는 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바라볼까 겁이 났다.  잠시라도 밖에 나갈라치면 예전보다 더 겉모습을 신경 쓰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아이를, 그것도 3명의 아이를 낳은 것이 사실이지만 거리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 그 사실을 알아챌까 봐 두려웠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스스로를 꾸미기란 정말 어려워진다. 사실 나는 그리 예쁜 편도 아니다. 평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출산 후에 내가 별로인 이유는 전부 아이 때문인 것만 같았다. 아이가 수시로 자신의 손을 갖다 대고 얼굴을 문지를 곳이었기에 화학약이 들어간 어떤 것도 바를 수 없었다. 아이를 혼자 앉혀놓고 거울 앞에 앉을 시간이라 부르기도 뭣한 아주 짧은 짬도 낼 수 없었다. 피부가, 몸매가, 신경 쓰지 못한 헤어스타일이 부끄러웠다. 아이가 신기해하며 잡아 뜯고야 마는 귀걸이나 목걸이도 몸에 걸칠 수 없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단지 '엄마', 그것만 온몸에 걸치고 있을까 봐 나는 괴로웠다.


그런데! 그 윤기 없는 얼굴을 마스크가 가려주었다.

코로나 19가 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마스크가 어색하던 시절, 습관처럼 생기를 돌게 해 줄 립스틱 만이라도 입술에 바르고 밖을 나서려다가 깜짝 놀랐다. 어차피 마스크를 끼면 보이지도 않을 것 아닌가. 화장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스크가 초라해진 얼굴을 가려주었다. 마스크 뒤로 나의 우울도 감춰졌다.




당연하던 것들이

고마워졌다.


사실, 산후우울증이란 그리 간단히 사라지진 않았다. 출산 후 호르몬은 나를 공격해 다. 아무 일이 아닌 일에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도 했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았지만 누가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 말한다면 네까짓 게 뭘 아냐며 한 바탕 몰아치며 쏘아 대기도 했다. (그 누구는 대부분 남편이었다) 아이의 찢어지는 울음과 나 사이에 켜켜이 장벽들을 세우자 울음소리가 점차 희미해지기도 했다. 눈길을 주지 않음으로써 아이에게 닥칠 위험을 모른 척 해 버리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긴 이 작은 몸을 내가 돌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12층 아파트 베란다에 선 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울음을 쏟아내는 작은 엉덩이에 손바닥을 갖다 대는 소리가 점차 커져가기도 했다.


극단적인 '우울감'이 그러하듯이, 모든 문제는 삶과 죽음 사이 어디쯤에 있는 일들 같았다. 이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아이가 사라진다면. 내가 사라진다면. '만약'이 만들어 내는 세상 속에서 현실은 더욱 비참해져 갔다. 그런데 뉴스 속에는 생사의 길목에서 진정 죽음을 향해 가는 이들과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이들의 노고가 가득했다. 감히 사소한 일로 죽음을 떠올리는 일이, 불행하다 하는 일이 죄스럽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 우울하다는 말에 누군가는 (역시 남편은) 그럴 수는 있겠지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로, 조금만 더 크면 나아질 거라는 말로 위로했다. 코로나도 그랬다. 조금만 있으면 백신이 개발되고 모든 것이 끝나고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흐르면. 조금만 지나면. 정말 속에서도 희망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 놈의 코로나는 끝날 기미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제 괜찮겠지 하는 순간, 또 어디선가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다. 육아 역시 그렇다. 아이를 낳은 이상 '산후'우울증은 사라진대도 아이로 인한 우울감은 결코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은 채 가끔씩 나를 덮어올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코로나 발생 전과 후는 결코 같을 수 없을 거라고. 엄마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출산은 그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너무나 다르게 만드는 일이다. 엄마라서 느끼게 된 우울감. 엄마니까 떨쳐버려야 한다고 쉽게 들 말하는 부정적인 기분의 굴레는 코로나바이러스처럼 끈질기게 누군가를 괴롭힐지 모른다. 엄마도 아이 때문에 힘들다. 힘든 게 당연하다. 인정해 주는 것. 코로나바이러스로 일상을 공격받은 사람들, 집 안에 갇힌 사람들, 그 사람들의 우울이 인정받는 것처럼 출산으로 인한 우울함도 인정받고 공감받고 위로받는 것. 그것이 출산 자가 격리자가 격리 해제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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