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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살 Mar 21. 2024

"엄마의 밥은 맛이 없어"

나의 집밥은 너에겐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겠지.. 요리 못하는 엄마의 투정

엄마의 밥은 맛이 없어

잔뜩 어질러진 부엌의 잔해들을 뒤로하고 식탁만 대충 물티슈로 훔쳐냈다. 급히 만든 바지락 순두부찌개와 소시지 볶음을 상에 올린다. 


"오늘은 뭐 먹어?" 


재차 물어오던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순두부찌개를 보더니 냉큼 앉아 국을 떠먹는다. 냉장고에서 밑반찬들을 꺼내 뚜껑을 채 열기도 전이다. 내 밥을 담는 것은 가장 마지막이다. 이제 다 했구나. 하고 앉아 내 입에도 밥을 밀어 넣으려는 찰나 냉정한 평가가 쏟아진다. 


"음, 별로 맛이 없네". 


찡그린 내 얼굴을 눈치챘는지 다시금 말을 더한다. 


"아니, 맛이 없다는 게 아니고 맛이 느껴지지 않아. 싱거워" 


고작 10살 주제에, 입맛은 뭐 저리 까다로운지. 


바지락을 검은 봉지에 담아 소금을 뿌려 해감을 하고 물로 수차례 헹궈내고, 소시지 하나하나마다 지그재그 칼집을 내고, 양파와 파프리카를 썰고, 불 앞에 서서 볶던 노고가 한순간 무너지는 느낌이다. 이 초라함을 어찌해야 할까. 그 누가 정성껏 만들어 내놓은 것을 나쁘게 평가할 때 기뻐하겠냐만은, 아이가 내 요리를 평가할 때면 유독 서운한 느낌이 든다. 학교 급식이 맛있다며 칭찬할 때에도 말하지 못한 패배감에 휩싸인다. 


'내 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딴에는 모든 정성을 다 한다고 한 것인데.'

 '내가 아니라면 너에게 이렇게 해 줄 사람도 없을 텐데'. 

그것도 몰라주고 내리는 부정적 평가에 

'어디, 감히'라는 생각이 드나 보다. 

내가 애써서 해 준 것들이 너에게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는 현실 자각 타임. 


이제 10살이니 나의 요리만 평가하는 데 그치겠지만, 저 아이가 조금 더 자랄수록, 자기 세계가 커지고, 그리하여 세상 모든 것에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고 점수를 주려할 때. 그때는 나를 향해 어떤 날카로운 평가로 마음을 베이게 할까. 정성을 다 한다고, 애쓴다고, 너를 위해서 한다고 했던 일들이 너로부터 낮은 점수를 받는다면 나는 얼마나 더 무너질까. 벌써부터 그 기준이 생긴다는 사춘기가 두려워졌다. 




오직 먹이기 위해 이어지는 삶 같았다. 

그렇다. 나는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요리를 취미라 말하는데 나는 한 번도 요리를 하는 과정에서 재미와 흥미를 느껴본 적이 없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쌀을 씻어 밥솥에 안쳐 본 적조차 없다.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처음 시도해 봤던 미역국은 20인분의 미역을 모두 털어놓고 넘치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은 냄비를 마주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누군가를 잘 먹여서, 잘 키워내는 일이 나의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아이들이 잘 먹는 음식 레시피를 찾았고, 신선한 재료를 장바구니에 넣고 할인쿠폰을 찾아 최적의 결제조건을 찾느라 결제까지 마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새벽 일찍 누군가가 문 밖에 놓고 간 재료를 냉장고와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었고, 때가 되면 넣어놓은 것들을 꺼냈다. 간장을 몇 스푼 넣어야 하는지, 설탕은 또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요리마다 인터넷을 뒤지지 않고 그냥 대충 휘~ 둘러 넣을 수 있게 되었던 것. 매일 반복된 요리로 내가 내세우며 자랑할만한 성취는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런데 그마저도 맛은 없다는 냉혹한 평가를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엄마의 집밥을 최고로 여기며, 그리워하며, 고마워한다는데. 나는 너에게 그런 집밥을 만들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긴 하지만. 나를 더 견디지 못하게 하는 건 따로 있다. 바로 고작 밥 때문에 오락가락 기분을 맞아야 한다는 사실. 아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식욕'을 채우느라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인 욕구 '자아실현'을 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바닥을 쳤다. 내내 꼼지락거리며 무언가를 만들어 내놓은 것 같은데,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밥은 아이들의 목구멍으로 사라졌고, 잔해를 씻어 깨끗하게 하는 역시 내 몫이었다. 그리고 거기를 다시 채우는 일이 반복됐다. 의미 없이 돌을 밀어 올렸다가 해가 뜨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 돌을 만나야만 하는 시지우프가 따로 없었다. 


아니, 식사 후 밥풀은 남았다. 맛없는 요리라도 내 입으로도 쑤셔 넣고 나면 이제는 바닥을 치울 차례다. 식탁 위에 언젠가부터 늘 자리하고 있는 물티슈를 꺼내 들었다. 잘못 문지른 밥알은 형태도 알 수 없이 으깨어져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뱃속으로 들어갔다면 힘이라도 나게 도왔을 알갱이들은 바닥에 뭉개지고 즈려 져서는 물티슈에도 따라붙지 못하고 시꺼멓게 남았다. 그러고는 또 싱크대를 향한다. 


모든 먹는 행위가 끝나고, 밥상 아래를 치우고 또 설거지를 하고. 그렇게 다 치웠는데도 어느새 갑자기 어느 틈엔가 튀어나오는 밥풀 한 알처럼 내 노고의 대가는 형편없는 모습으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않은 시간에, 튀어나와 나를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음식을 만들고, 먹이고, 먹고, 치웠다. 그러나 어느 행위의 목적어도 나인 것이 없었다.  '먹다'라는 간단한 행위 하나만 하려 해도 장을 보고, 먹기 위한 음식을 '준비'하고, 먹을 수 있도록 식탁 위에 '차리고', 또 그 이후에 '치우는' 행위를 동반했다. 그저 숟가락을 들어 밥을 떠서 입에 넣는 행위만을 '먹다'라고 정의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밥, 그까짓 밥. 그래도 밥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반찬투정을 늘어놓은 저 아이를 째려보다가 이내 멈춘다. 그저 자신이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국이 싱겁다' 말한 아이를 향해 왜 그리 서운함을 가졌을까. 국이 싱겁다고 말하면 서운해하지 말고, 소금 조금 넣어 다시 끓여줬으면 될 일을. 아니면 그게 내 요리실력의 전부다 솔직히 인정하고 대신 조금 짜게 된 다른 반찬을 얹어줬으면 될 일을. 


앞으로는 아이가 나를 향해 내리는 평가에 서운함으로 긁히지 않아 보련다. 내가 정성을 다 했다고 해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해서 아이에게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 받아들이면 될 것이 아닌가. 


내가 저 아이를 만들어 낳았지만, 저 아이가 나를 부모로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를 만들어 준 것이다. 내 요리가 몇 점짜리든 상관없이 나는 네 엄마니까.  나 역시 점수 매기는 일 없이 너를 내 아이로 받아들일 거니까. 



웹툰 <미생>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바둑, 그까짓 바둑. 그래도 바둑


고작 12글자를 오래도록 되뇌어본다. '바둑'이라는 단어 자리에 '밥'을 넣어보자니 어쭈구리, 여차하면 눈물까지 나올 셈이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일. 몰라도 상관없고, 관심을 내어줄 겨를조차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어쩌랴. 엄마인 나에게는 전부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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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오늘 저녁은 또 어떤 밥상을 차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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